K-오서 어워즈

제10화

2014.12.14

묘 증후군 | 이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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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실수하고 말았다.

올해부터는 5만 원이 넘는 간이 영수증은 받지 않는다는 말을 깜빡 잊고, 철학과 답사 동안 썼던 수백만 원의 학교 지원금에 대한 결과보고서에 5만 원 이상이 기재된 간이 영수증을 잔뜩 붙여놨던 것이다. 꼼꼼한 경리과 직원이 서류를 되돌려 주며 지적해준 대로라면 당장 수 십장의 간이 영수증을 구해다 붙여야 하고 보고서도 새로 써야 할 판이었다. 없는 영수증을 다시 구해야 한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 복잡한 계산을 다시 해야 하는 난감함에 나는 보고서를 받아들고 경리과를 터덜터덜 나오고 있었다. 숫자가 얽힌 일이라면 머리부터 지끈지끈 아팠던 데다가, 또 실수했다는 창피함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최수연, 그녀였다. 그렇지 않아도 실수한 부분을 지적당하는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그녀였는데, 역시나 그녀는 나를 위로하려는 듯 밝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 선생님, 그거 제가 도와드릴까요?”
“네?”
“제가 도와드린다구요. 수고비는 식사 정도면 되고요.”

나는 뜻밖의 제안에 내심 기뻤지만, 조심스럽게 ‘그래도 될까요?’라며 최대한의 예의를 보이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일만 해결된다면 까짓 식사쯤은 몇 끼라도 살 수 있는 문제였다.

6시 이후에, 약속대로 철학과 행정실에 그녀가 들렀다. 특이하게도 손에 커다란 우유를 들고 온 그녀는 책상 위에 우유와 가지고 온 가방을 올려놓더니 나와는 간단한 인사만 나눈 채 일을 시작했다. 어디서 났는지 공영수증을 잔뜩 꺼내놓고, 보고서에 맞게 영수증을 작성해서 하나하나 붙여갔다. 가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는, 습관인 듯 갸릉갸릉 이상한 소리를 내는 그녀를 보며 난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한동안 대화가 없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어색해 우유를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하고 말을 건넸다. 내 말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는 듯 두어 박자 늦게 나를 바라보았다.

“우유는, 그냥 먹어요. 길들여져서 그렇죠. 사실 소화도 잘 못 시켜요. 우리들이 밖에서 우유를 어디서 구할 수 있었겠어요?”
“우리요?”

내 질문에 답도 없이 시선을 다시 공영수증에 둔 그녀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매우 빠른 속도로 수십 장의 영수증을 다 틀린 글씨체로 작성하고 있다는 것에 난 더욱 놀라고 있었다.

“놀랐죠? 다른 사람 글씨체 따라 하는 것이 제 특기에요. 한 번 보면 안 잊어먹죠.”

어깨너머로 구경하고 있던 나를 휙 뒤돌아보며 그녀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다른 글씨체로 쓰려 해도 자신의 흔적이 보이기 마련인데, 그녀는 완벽하게 서로 다른 글씨체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30여 분이 흘렀을까, 내가 반나절은 걸려야 할 일을 다 마치고 그녀는 보고서까지 새로운 영수증에 맞게 정리해 이미 프린트하고 있었다. 이내 보고서를 뽑아든 그녀는 씩 웃으며 내게 턱턱 흔들어 보였다.

“이대로 인문대 학장님과 기획과 도장 받아서 내일 아침에 저에게 주세요. 특별히 제가 직접 처리해 드릴게요.”

난 그녀의 능수능란한 일 처리에 놀라며 물개 박수라도 쳐야 하지 않을까 싶었고, 정말 마음으로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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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준

제4회 여수해양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2005 평화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 10년 동안 간간이 문학잡지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스스로를 ‘三文文士(서푼짜리 소설가)’로 부르며 살아왔다. 도보여행과 낙서를 좋아하고, 여행작가가 평생 꿈인 게으름뱅이이다. ‘철학’과 ‘국문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대학에서 글쓰기 관련 교양과목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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