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인터뷰

북&인터뷰 등록일 | 2016.02.05 조회수 | 7,481

시인 신달자 "나의 대표작은 오늘 밤에 쓸 시"



한국의 대표 여성 시인으로 꼽히는 신달자 시인. 그녀는 지난해 12월,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했던 15편의 이야기에 64장의 사진을 더해 <신달자 감성 포토 에세이>를 펴냈다. 삶의 길 위에서 힘들어할 누군가에게 ‘링거 한 방울’ 같은 책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글들이다. 그런 시간을 겪은 사람으로서, 힘겨워할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했다.

“가르치기만 하려는 어른들이 너무나 답답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중략) 건방지게도 어른들을 내 허리 아래로 끌어내리는 망발을 저지르면서 그것을 꿈이라고 해석하곤 했다. 어른들은 다 웃겼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다 바보 같았다. 그런 덜떨어진 우월감이 또한 청춘이기도 했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청춘의 시기란 20대라고 생각한 그것부터 잘못이었다. 건방지게도 나는 30대가 되면서 청춘이 다 지나갔다고 말했으니까.” - <신달자 감성 포토 에세이> 124쪽

손자를 향한 따뜻한 시선, 삶에 대한 회고, 지난 시간에 대한 덤덤한 이야기가 정호승 시인의 추천사처럼 ‘소담한 눈꽃의 언어’로 새겨져 있다. 많은 것을 이뤄낸 어른을 마주하는 일은 그 자체로 부담이 되지만 그날 시인이 보여준 모습은 앞선 긴장들을 모두 무너뜨렸다. 묻고 싶었고 듣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미리 적어온 질문과는 달리 튀어나갔고, 시인은 긴 인터뷰 후에도 상대가 따뜻한 차 한 잔을 모두 마실 수 있도록 마주 앉아 배려했다. 어느새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의 인터뷰이가 아닌 따뜻한 어른이었다.



Q 선생님이 살아오신 삶의 단편들이 책에 담겨 있더라고요. 그 속에서 위로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문학사상’에 연재하신 글을 모아 책으로 엮으셨는데, 어떤 기획으로 시작된 연재였나요?

‘방황하는 사람들을 손잡아주자’라는 테마를 가지고 쓴 글이에요.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아픈 사람들이 많잖아요. 특히 젊은이들. 대학 졸업 후에도, 취직 후에도, 가정을 이루고 나서도 힘든 사람들. 우리 눈에 잘 살고 있는 사람인데도 마주 앉아 차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그 사람도 결국에는 눈물 바가지야. 저도 삶의 바닥까지 갔다가 다시 일어선 사람이에요. 그때는 그냥 ‘이 언덕, 이 땅은 내 발로 디뎌야 낮아진다. 자꾸 밟고 걸어서 평탄하게 만들자.’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공감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었던 거죠.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예요. 내 글을 보고 누군가 링거 한 방울 맞는 느낌이 든다면 좋겠다는 거.



Q 손자에게 보내는 편지나 어머니에 대한 회고 등 책에 소개된 이야기 너머의 삶도 궁금해지더라고요.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크신 것 같았어요.

우리 어머니는 기역 자도 모르는 문맹자였어요. 딸들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시절에  깡촌에서 마산이며 부산이며 딸들을 유학 보냈죠. 딸들을 공부시키면 본인 인생도 바뀔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여자들을 대학도 잘 안 보낼 때에요. 딸을 유학 보낸다고 집안이 난리가 났는데, 그 난리가 난 후에도 나를 부산으로 또 보내셨어요.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를 부산으로 갔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남자 그거 별 거 아니다.”

평생을 시골에서 사신 분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그러셨어요. 어머니에게 동서가 한 명 있었는데 그분은 경복여고를 졸업한 분이었거든요. 당시 경복여고 나왔다고 하면 정말 명문학교 나온 것 같은 인정을 받았어요. 게다가 아들이 귀했던 시대에 숙모는 6남 1녀를, 저희 어머니는 1남 6녀를 낳았어요. 여러 가지로 동서와 본인이 얼마나 비교가 됐겠어요. 딸들을 동서보다 더 똑똑한 여자로 기르겠다고 다짐하셨던 것 같아요.

두 번째로 강조하신 게 “돈 벌어라. 내가 살아보니까 여자도 돈이 필요하더라.”라고 하시더라고요. 자존심도 강하신 분이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쓰는 것이 자존심 상하셨던 거예요. 마지막으로는 말씀하셨던 건 “행복한 여자가 돼라”라는 말이었어요. 첫 번째, 두 번째를 다 이루고도 행복한 여자가 되라고. 모두 다 우리 엄마가 갖지 못한 것이었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금 저도 딸이 셋인데 나중에 우리 딸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우리 어머니와 똑같은 이야기를 쓰지 않을까 싶어요.





상실의 시간들을 견디게 한 어머니의 말 "행복한 여자가 돼라"



Q 첫사랑, 부산 유학 등 학창시절에 대한 이야기들도 짧게나마 나오는데, 잔상이 오래가더라고요. 당시 부산으로 유학을 떠난 후 바다를 보면서 문학적 감수성을 많이 키우셨다고 했는데, 주변환경이 바뀌면서 사춘기 시절에 찾아온 변화도 컸을 것 같아요.

그렇죠. 유학 가서 1959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경남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나가서 1등을 했거든요. 당시에 낸 시 제목이 ‘길’이었어요. 산에서 바다로 오는 길에 대한 내용을 썼어요. (주변환경 변화의) 영향을 받았던 거죠. 그때 아버지가 일주일에 꼭 한 번씩 편지를 쓰라고 숙제를 내주셨는데 그 영향도 많이 받았죠. “편지 보내라. 안 쓰면 용돈 안 준다.”라고 하셔서 처음에는 뭔가 있어 보이려고 “아버님 전상서. 기체후 일향 만강 하옵시고…” 이렇게 썼어요.(웃음)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그랬더니 아버지가 “이건 편지도 아니다. 용돈 줄 수 없다.”라고 하셔서 정말 한 달 동안 용돈 없이 친구들에게 돈 빌려가며 생활했어요.

그래서 꾀를 낸 게, 카스칼 명언집이나 문학작품을 그대로 베껴서 내가 쓴 것처럼 편지를 썼더니 아버지가 참 좋아하시더라고요. 대학 진학 후에는 창작의 의미를 알게 되니 베끼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때부터 나만의 필체가 생기기 시작한 거죠. 돌이켜보면 제 문학의 지주는 아버지, 어머니예요. 우리 아버지는 몇 십 년 동안 빼놓지 않고 일기를 쓰셨고 늘 감정적으로 방황하셨던 것 같아요. 참 문학적인 사람이었죠. 엄마는 문학적이라기보다는 현명한 여자였고요.



Q 대학 졸업 후에는 구직난을 겪기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앞서 말씀하신 ‘링거 한 방울’이 필요한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잘 이해해주시진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1960년대는 취직이 잘 안 됐어요. 전화번호만 보고 무작정 찾아가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굴욕스럽게 취직을 하러 다녔는데 당시 제 친구는 미스코리아가 되고 미스유니버스가 되면서 좋은 기업에서 스카우트를 해갔어요. 상대적인 박탈감도 많이 느꼈죠. 시대가 변했지만 여전히 그래요.

저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조금 더 규모 있게 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것만이 자기 것이거든. 살아보니까 시간 참 빠르더라고요. 그 사람의 삶의 질을 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를 보면 돼요. 그리고 생각만 하지 말고, 마음에만 품지 말고 그게 무엇이든 실행하세요. 부부 간에도 애정표현을 안 하는 사람들은 꼭 “마음속으로는 늘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하는데 마음 안에만 있으면 아무 소용없어요. 나도 젊은 시절에 하지 못해서 후회되는 것들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꼭 아쉬운 것이 생겨요.



Q 결혼 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죠? 글쓰기를 멈추게 된 시기도 그때였고요.

가족도 많고 아이들도 연년생으로 태어났고 글을 쓸 수가 없었어요. 당시에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밤마다 서랍장을 열고 닫으면서 뭔가를 계속 찾아 헤맸어요. 남편이 “뭘 그렇게 찾는데?” 물어도 저 역시 제가 뭘 찾는지 몰랐어요. 그러다가 대학 은사님인 박목월 선생님이 집에 찾아오셔서 저한테 “요즘도 글 쓰니?” 물으셨는데, 자리에 앉다 말고 그제야 내가 뭘 잃어버렸던 건지를 알게 된 거죠.



Q 스승님 덕분에 어렵게 다시 잡은 펜을 잡은 지 얼마 안 돼서 ‘인생의 밑바닥’이라고 말했던 힘든 시기를 겪게 되셨습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973년에 첫 시집 <봉헌문자>를 냈는데 1977년에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때부터 생계를 책임져야 하니까 너무 힘들고 어려웠죠. 사랑으로 힘들고 이별에 아프고 하는 이야기들은 나한테 전부 사치였어요. 경제적 파탄처럼 어려운 게 없으니까…. 늘 중환자실에서 남편 곁을 지켰는데, 어머니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는데 소식을 듣고 나를 몰래 보고 가신 거예요. 가서 우리 올케한테 말했대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 나와보라고 하면 달자가 걸어나오게 생겼다.” 6개월 뒤에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그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항상 저한테 “넌 꼭 잘 될 거다” 그러셨거든요.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도요. 엄마가 나를 놓지 않으니 내가 나를 놓지 못하겠는 거예요. 엄마가 늘 말했던 것처럼 행복한 여자가 돼야 엄마를 당당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바로 교수가 됐어요. 석사, 박사 때 엄마 무덤에 가서 모자 덮어주고 그랬죠. 1988년에 <백치애인>부터 작품 몇 개가 연달아 잘되면서 경제적으로 조금 나아지기 시작했죠. 그때 인세를 받아서 수표로 몇 십만 원씩 무덤에 묻고 오고 그랬어요. 그래야 엄마가 편히 눈 감지 않으실까 싶어서요.





"치열한 문학 정신을 점차 희박하게 만들고 있는 사회"



Q 어머니는 ‘행복한 여자’로서의 가치를, 스승님은 ‘좋은 작가’로서의 가치를 일깨워주신 거네요. 박목월 시인의 한마디를 평생의 교본으로 삼아왔다고 하셨어요. 무슨 이야기였나요?

선생님의 시 ‘나그네’가 교과서에 실렸을 때 어렵게 물었어요. “그러면 선생님 대표작은 ‘나그네’예요?” 그러니까 “아니다. 오늘 밤에 쓸 거야.” 그러셨죠. 너무 충격 받았어요. 자신의 시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분이었는데도 늘 대표작이 없다는 생각을 하시면서 작품에 매진하신 거예요. 서정주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도 잊히지 않는데, 당시에도 이미 60년이나 시를 쓰신 분께서 “나는 지금도 백지 앞에 있으면 떨린다”라고 그러셨어요. 참 대단하신 분들이죠.



Q 선생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어떤 것들을 중요시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나도 늘 그 이야기를 했어요. 내 대표작을 오늘 밤에 쓴다는 마음으로 시를 써야 한다고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항상 말하는 것이 있었어요. “문학은 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돈이 많은지, 좋은 집에 사는지, 좋은 차가 있는지, 좋은 부모가 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다만 네가 쓰는 문학이 무엇인지를 물을 것이다.” 취직하려면 스펙이 필요하고 결혼하려면 배경이 중요한 시대라지만 문학은 그래요. 작품만 잘 쓰면 ‘문학의 고위층’이 되는 거예요. 누군가 박목월 선생님보다 더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는 거죠.



Q 시를 보면서 느끼는 세대 변화도 클 텐데,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뭐랄까, 이전의 문학인들보다 문학 그 자체에 파묻혀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시대가 그렇죠. 문학 하나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는 시대니까. 문학에 온전히 ‘올인’ 할 수 있는 치열한 정신을 이 시대가 점차 희박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나부터도 그렇지만, 너무 좋은 엄마 아빠가 되려고 하고. 문학에 푹 빠지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거죠. 좋은 직장인, 좋은 아빠, 좋은 엄마가 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문학에 투여되는 열정이 나뉘니까요. 내 역할에 분할이 생기니까 스스로 절제하는 경우가 생기고요. 그런데 현실 때문에 어쩔 수가 없죠. 반면에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내가 쓰지 못하더라도 좋은 시를 만나면 굉장히 기쁘고요. 몇 년 안에 정말 좋은 시인이 어디선가 툭 튀어나오겠죠.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죠.



Q 작가분들 중에서 직장생활이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분들이 꽤 많더라고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작가님도 그런 상황을 겪어보셨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안쓰럽죠. 자신감 속에 창조력도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제대로 안 되고 자신감이 떨어지면 저는 창의력도 떨어진다고 봐요. 그저 방황하다 보면 어느 날 잘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시대가 달라진 거예요. 글 쓰는 사람들도 요즘 참 고민이 많을 거예요. 저 역시도 여전히 고민이 많습니다. ‘정말 내가 최선을 다해서 글을 쓰고 있는가? 내가 정말 이것밖에 못 쓰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더 쓸 수 있는데 이것만 쓰고 있는 건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요.



Q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결핍에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행복이 절실해지는 것 같고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안 좋은데 좋게 생각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오래 곱씹게 되더라고요.

행복이라는 것은 명확하게 기준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순간적으로 어떤 것에 도취된 상태를 행복이라 느낄 수도 있는 거고요. 그 말은 곧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다만 요즘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좋은 집, 혹은 좋은 차 등으로 정형화돼 있는 게 문제죠. 좋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사람은 늘 갖지 못한 것을 그리워하게 돼 있어요. 많은 것을 가졌어도 내가 가진 것은 절대 계산하지 않거든요. 없는 것만 계산하니까 늘 불행해져요. 살아보니까, 행복은 어느 날 선물처럼 주어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모두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어쩌면 자신이 행복을 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사진 : 기준서(스튜디오춘)/ 장소 협조 : 카페 고희






임인영(북DB 기자)

취재와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탐색 중입니다. iylim@interpark.com

작가소개

신달자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시집 『열애』, 『종이』, 『북촌』 등이 있다. 공초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현재 문화진흥정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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