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인터뷰

북&인터뷰 등록일 | 2015.06.19 조회수 | 10,331

“자신만의 아름다운 편견이 필요해요”



“아무쪼록 편견으로 가득한 이 글들이 가깝고 살가운 이가 들려주는 다정한 속삭임쯤으로 여겨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 2015년 봄 손홍규

<다정한 편견>은 소설가 손홍규가 2008년 11월부터 2012년 5월까지 경향신문에 <손홍규의 로그인>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칼럼을 묶은 책이다. 당시에 썼던 180편의 글 중 138편을 골랐다.

모름지기 ‘편견’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어왔다. ‘편견이 심한 사람’이라고 하면 보통 이해심이 부족하다거나 꽉 막힌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한다. 헌데 작가는 무엇 때문에 편견이 다정하다고 말하는 걸까?

“사실 모든 생각은 편견이잖아요. ‘편견’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거고, 그걸 자신있게 말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편견을 자주 마주해요. 제가 제 자식에게 “예쁘다”고 하는 것도 편견이잖아요. 그걸 어떻게 다정하지 않게 말할 수 있겠어요. 진심이 담겨 있으면 편견일 수밖에는 없죠” - <인터뷰 중>

1부 시간이 지날수록 초라해지는 목록, 2부 선량한 물음, 3부 바느질 소리, 4부 다정한 편견으로 구성된 책은 작가의 가족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 삶과 사회에 대한 성찰, 문학을 대하는 태도, 모순적인 사회와 이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원고지 4.5매 눌러 쓴 그의 진심, 곧 그만의 편견으로 가득한 그의 글은 참 다정하고 날카롭다.

작가가 삶을 대하는 시선을 작가만의 표현으로 풀어낸 책은 간직하고 싶은 문장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문장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 마다 눈을 감고 작가가 대하는 삶과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다정한 편견>의 작가 손홍규를 만나 그의 ‘편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Q <다정한 편견>은 3년 반 동안 ‘경향신문’에 ‘손홍규의 로그인’으로 연재했던 칼럼 138편을 엮은 책인데요. 오랜 시간 연재했던 글이라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글을 쓰면서 한번은 엮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씩 연재를 했었는데 그 시간이 긴 것 같지만 한편 마감하면 또 마감이 다가오더라고요. 게다가 원고지 4.5매 분량을 맞춰서 써야 된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그런데 반년쯤 지나고 나니까 형식이 익숙해진 것도 있겠지만 부담스러운 게 사라지더라고요. 내용 제약도 없으니까 저로서는 진짜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잖아요. 오히려 즐거워지더라고요. 그렇게 몇 달 지나고 나서는 글을 쓰면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됐고요. 

대체로 글이 한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 방식을 보면 글은 하나의 ‘기억’이 되어서 나오기도 하고 ‘순간’을 통과하는 자신, 또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겪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으로써 ‘상상’하는 것들이 돼서 나오기도 하죠. 글을 쓸 때 그런 제약 없이 기쁘게 썼기 때문에 글이 한 사람과 맺는 다양한 모습들이 드러난 것 같아요. 

Q 천천히 읽다가 잠시 덮고 생각에 잠길 만큼 가슴을 울리는, 소장하고 싶은 문장이 많았어요. 보통 예전에 쓴 글을 읽으면 자괴감에 빠진다고 하던데 작가님은 해당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웃음)

하하. 자신의 글 앞에서는 발가벗긴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늘 마주쳐야 하는거죠.

누군가 ‘철거민은 죽어도 좋은 존재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가 편견을 지녔다며 비난할 것이다.하지만 진실은 어떠한가. 사회는 마치 철거민을 귀찮은 존재처럼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죽어도 좋은 존재처럼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의 견해는 편견인가 편견이 아닌가. 사회적으로 그의 견해는 올바르지 않은가. 적어도 그의 견해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건 편견이 아니다. 진정한 편견은 ‘철거민 역시 인권을 지닌 존재다’라는 진술이다. ‘경찰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라는 주장이야말로 진정한 편견이다. 편견이 필요한 시절이다. 아름답고 올바른 편견이 절실한 시절이다. 해서 나는 편견을 사랑한다.

<다정한 편견> 중에서



Q <다정한 편견>이라는 제목이 참 재미있었어요. 처음엔 “어떻게 편견이 다정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고요. 사람은 객관적이려고 노력을 해도 주관적인 편견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잖아요. 

일반적 의미에서 편견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고 독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라고 비난받을 만한 견해잖아요. 그런데 사실 ‘모든 생각’은 편견인데. 편견이라고 해도 좋으니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말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예요. 편견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편견이라는 사람의 생각은 우리가 ‘말’로 뱉지 않는 것이 더 많잖아요. 왜냐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했을 때는 어느 정도 걸러져서 나오는 거니까. 그래서 진정한 자신의 생각, 곧 편견이라는 것은 사실 한번도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죠. 저는 이 글을 쓸 때 그런 자기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몰입해 쓸 수 있었어요. ‘제 생각’이라는 순수한 의미에서 편견이라고 표현했고요. 

Q 많은 지성인들이 요즘 젊은 사람들이 주체성을 잃고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잖아요. ’아름답고 올바른 편견이 필요한 시절‘이라고도 하셨는데, 같은 맥락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뜻인가요?

‘주체성’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세상에서 느끼는 것들이 있음에도 그것이 편견으로 비난받을까봐 말하지 못하는 생각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누구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편견이야말로 어떤 편견보다 따뜻하고 다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편견을 자주 마주해요. 제가 제 자식에게 “예쁘다”고 하는 것도 편견이잖아요. 그것을 어떻게 다정하지 않게 말할 수 있겠어요. 진심이 담겨 있으면 편견일 수밖에는 없죠.

’저 아이도 알겠지. 훗날 왜 이 순간 어머니를 보며 싱긋 웃어주지 않았나를 자책하는 때가 오리라는 걸. 되돌아갈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는 매 순간들이 우리의 역사라는 걸.’

<다정한 편견> 중에서






Q 책 초반에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졌어요.

가족은 이미 나에게 다가와 있는 존재들이잖아요? 우리가 흔히 실수를 하는 건 멀리 있는 사람에게 실 수 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에게, 너무나 가깝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에요. 우리가 외롭다고 느낄 때도 가까운 사람 때문이지 않나요? 모든 것에는 상대방의 말하지 않은 것들, 표현하지 않은 것들 속에 상대방의 진심과 본심이 있을 가능성이 큰데, 그것을 이해하려면 노력해야하는데 가깝기 때문에 그냥 이해한다고 말해요. 가족의 문제라면 결국 이해라는 것이 어느 한 순간에 깨달음으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한 평생 혹은 떠나고 난 뒤에 뒤늦게 완성될 수도 있는 종류의 이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요. 

제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고향에 내려갔어요. 그때가 서른아홉이었는데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부모님께서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기분이 좋으시니까 제 어린시절 흠을 들추시면서 아내에게 장난을 치시는 거예요. 어린 시절 제가 친척집에 갔다가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길이었는데 제가 화장실에 가려고 아버지와 함께 통로로 나와 볼일을 보는데 순간 경적이 울렸고 그 소리에 너무 놀라서 담배를 태우시던 아버지의 담배를 쳤던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내가 담배 피우다가 아들래미 손 데이게 하고 그날 밤 잠도 못자고 그 다음날 담배를 끊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일 때문이라는 걸 몰랐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항상 평생을 함께 살면서도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는 늘 비밀일 수밖에 없고, 그 비밀은 간직해야할 비밀도 있지만 비밀이 아니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향해 끝없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알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도덕적인 문장이란 도덕을 옹호하는 글을 뜻하지 않는다.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적었다고 해서 도덕적인 문장인 건 아니다. 문장의 경우 도덕성이란 우리가 글로 옮기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이해를 뜻한다.

<다정한 편견> 중에서



Q ‘도덕적인 문장이란 도덕을 옹호하는 글을 뜻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좋은 글을 쓰려면 진실 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어요.
 
도덕적 문장이라는 것은 글의 내용이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우리가 사랑을 할 때는 자신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게 있잖아요. 그럼에도 관습적인 표현에 의탁하는 것-이것은 자신이 진짜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을 되풀이 하는 것이 지나지 않아요. 정말 윤리적인 문장이라는 것은 자기가 진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쓰는 거라고 봐요. 

그러면 어떻게 했을 때 자신만의 문장을 쓸 수 있을까요? 이것 역시 사랑을 할 때와 똑같아요. 상대방을 눈에 보이는 것만 사랑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 사람의 체취, 어깨를 쓰다듬을 때의 느낌 등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성하는 요소들이죠. 이처럼 자신만의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오감을 동원해서 쓰는 글이고, 그럴 때 윤리적인 문장이 될 수 있어요.

그러므로 나는 오늘이 순간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세월이 지난 뒤에야 나는 알게 될 것이다. 매번 깨달음은 한 걸음씩 늦게 찾아오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내가 사는 시대의 증인이 되는 것뿐이다.

내가 소설가를 꿈꾸었던 문청 시절 이미 문학은 명성을 잃었고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상품이 되었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마저 수치스러웠던 때였다. 그때 나를 위로해준 건 ‘역사의 진보에 바치는 예술가의 봉사란, 그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확신하고 어디에 동조하느냐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사회적 현실의 문제와 모순을 얼마나 힘차게 제시하느냐에 있다’라는 문장이었다.

<다정한 편견> 중에서






Q 3부에서는 ‘삶과 문학’, ‘’독서의 자세‘, ’작가와 작품‘ 등 문학에 대한 글을 모아두셨는데,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문학과 작가 그리고 독자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졌어요. 

사람들이 문학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순간이 있어요. 인류의 문제로 봤을 때 인류가 해결하기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깊은 슬픔이나 괴로움에 빠졌을 때죠. 그때는 누구나 문학을 찾게 되요. 그래서 작가라는 존재는 언제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감각을 열어놓은 채로 느끼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장 독자들이 안 찾아준다고 해서 절망할 것도 아니고, 많이 찾아준다고 좋은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독자들이 진정으로 작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언제든 있기 때문에 묵묵히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봐요. 사실 독자에게는 “문학을 읽어주세요” 라는 것은 “괴로워지세요”라는 것인데 그럴 수는 없고 “저 항상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문학도 위안을 주는 문학이 있는가 하면 질문을 던지는 문학이 있잖아요. 일반적인 경우를 봤을 땐 사람들이 헐리우드 영화를 좋아하지만 프랑스 영화는 잘 안보죠. 그래도 외로운 사람들은 봐요. 문학은 문학끼리 경쟁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죠.

외출했다 돌아와 난장판이 된 방을 치우며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이란, 그게 설령 짐승일지라도 이처럼 사소한 사연들을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답지 못함에 대한 증오, 인간을 인간일 수 없게 만드는 조건들에 대한 증오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끔 해준 격렬하고도 원초적인 본능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이들에게 존엄을 요구하는 건 폭력이다.

<다정한 편견> 중에서



Q 작가님의 책을 읽고 있으면 작가님이 얼마나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고 그 진심을 담기 위해 노력했는지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마음을 유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봐요.

가치관과 세계관은 사람에 대한 태도인 것 같아요. 이를테면 경조사를 많이 챙겨야 하는데 저는 경사는 참석하지 못해도 조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참석하려고 하거든요. 제가 세계를 느끼는 방식인데 이것은 인간의 고통과 눈물 등에 무심할 수 없는 데서 비롯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1년에 한 두 번 꼴로 이사를 다녔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사만 가면 공사가 시작돼요. 집을 부수고 건축하고 그래서 편하게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저는 글을 쓸 때 그런 소리들이 많이 거슬려요. 제일 못 견뎌하는 소리는 자동차소리고요. 그런데 언제는 시장골목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데 왜 그런 곳에서는 사람들 소리, 밤이 되면 술 먹고 싸우는 소리 등이 있잖아요. 그런데 한번도 그런 사람의 소리가 제가 글을 쓰는데 방해를 받는 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Q 이 시대에 필요한 정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낙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물론 아무런 근거 없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가 사는 시대가 낙관할 수 없고 비관하는 게 당연한 시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하자는 것은 실현해야 하는 낙관이에요. 낙관하려면 최선을 다해야하고요.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는 다는 것이 말은 쉽지만 굉장히 어렵죠. 하지만 인간을 믿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해요. 낙관을 잊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Q.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앞으로요? 좋은 글을 쓰고 싶어요. 그리고 작가라면 누구나 그럴 거예요. 그리고 빨리 은퇴하고 싶어요. 그게 쉽지 않은 이유는 자기 인생에 ‘좋은 글’ 한 편의 글을 못 쓰고 있기 때문이겠죠. 온 생을 털어 쓸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한 생을 살고 난 후 작가로서 삶을 돌아봤을 때 가장 후회가 적은 삶은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아온 삶이지 않을까요? 설령 힘들게 살았다고 해도 최후의 순간을 돌아보면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을 얼마나 하고 살았는지 돌아볼 수밖에 없잖아요. 글을 쓴다는 것도 결국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썼을 때 후회가 적은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들이 있죠.

사진 : 신동석




김영은(북DB 객원기자)

20대 중반, 세상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려고 무작정 인터뷰를 시작한 여자.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다는 것에 감탄하고, 이를 통해 피조물로서의 목적과 가치를 찾는 것이 목표. fantastic8801@hanmail.net

작가소개

손홍규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톰은 톰과 잤다] [그 남자의 가출],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청년의사 장기려] [이슬람 정육점] [서울] [파르티잔 극장] 등이 있다. 노근리 평화문학상, 백신애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채만식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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