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삐딱한 영화읽기 '센스&넌센스' 등록일 | 2009.07.21 조회수 | 4,742

이별을 부르는 영화들

아마도 소개팅이라는 걸 처음 해본 시절의 얘기다. 우연히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그 여동생의 미모에 홀딱 반하고만 나는, 친구를 집요하게 꼬드긴 끝에 그녀와의 데이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머리결을 지닌 그녀는 키도 훤칠한 데다 아이큐도 150에 달할 만큼 똑똑하기까지 해 내 마음을 온통 휘저어 놓았다. 지금처럼 노래방도 DVD방도 없었던, 게다가 수중에 돈도 별로 없던 당시, 극장은 가장 값싸게, 그러나 가장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였다. 게다가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어둠을 틈타 슬쩍 어깨 위에 손을 얹거나 손을 잡는, 그런 유치한 꿈도 꿀 수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있는 돈을 탈탈 털어 그녀와의 데이트 한 달 만에 영화를 보러 갔다. 멀티플렉스가 없던 시절이니 지하철을 타고 시내 개봉관까지 가는 여정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본 영화가 당시 <터미네이터>로 주가 급상승중이었던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레드 쏘냐>(1985)였다. 시대 불명, 국적 불명의 배경 속에서 근육질 남녀의 격투기로 점철된 이 영화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영화 내내 한숨만 푹푹 내쉬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느라 좌불안석이었다는 것이다. 도무지 몰입할 수 없는 유치함의 극단을 달리는 영화 앞에서 극장 데이트의 낭만이고 뭐고, 분위기는 이내 썰렁해졌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온 뒤 헛웃음을 공유하고 헤어졌다. 나는 그 뒤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레드 쏘냐>

 
1년 뒤 나는 같은 학교 동급생과 사랑에 빠졌다. 한창 열병을 앓고 있을 무렵, 그녀와 <미션>을 보러 갔다. 멘도자(로버트 드니로)가 악랄한 노예상이었던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를 안고 이구아수 폭포 근처의 절벽을 기어 올라갈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펑펑 울었다. 그녀는 내 감수성에 감동했고, 나와 그녀는 영화가 끝난 뒤에 오랫동안 여운을 함께 곱씹으며 눈을 맞췄다. 소피 마르소를 닮은 그녀를 이끌고 프랑스 문화원에서 틀던 <라붐>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는 그녀와 나를 잇는 아주 중요한 매개가 돼 줬다. 

하지만 이별의 순간에 종지부를 찍어주기도 했으니, 재수 시절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느 끔찍한 영화를 함께 본 뒤, 우리는 자연스레 헤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여친은 대학입시에 목을 메는 나를 지루해 하고 있던 차였는데, 그녀와 함께 본 마지막 영화는 그야말로 지루함의 극단을 달리고 있었고, 덩달아 그녀에게 나의 지루함을 정황적으로 확인시키고 말았던 셈이다.

연애사와 영화의 알 수 없는 함수 관계는 대학에 들어와서도 변함 없이 이어졌다. 상대가 조금 마음에 들어 극장 데이트에 나서게 되면 어김 없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걸려, 상호 민망해지기 일쑤였다.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할 말도 없어진다. 그냥 머쓱한 기분 달래며 헛물 켜는 대화만 나누다 헤어지기 마련이다. 내 기억 속에 서너 명의 여성이 그렇게 영화 한 편과 함께 페이드아웃이 아닌 컷으로 사라졌다. 

이렇듯, 나의 연애사에 있어서 어떤 영화를 함께 봤느냐는 국면마다 아주 중요한 모멘텀이 돼 왔다. 멋진 영화에 함께 감동하며 사랑이 무르익었고, 썰렁하고 해괴망측한 영화를 보고 나면 어김 없이 이별이었다. 영화가 농익을 뻔한 연애 감정에 찬물을 끼얹은 건지, 아니면 원래 시들했던 연애 감정에 오비이락처럼 끼어들어 확인 사살을 해준 건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중요한 작업 단계에서 금세 전의를 상실케 만든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무진장 실망스러운 영화를 보고 나면 어김 없이 리비도가 급격히 줄어들며 상대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증발돼 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마도 그건 상대 여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어쨌든 이후로 나는 이성과 영화를 볼 때, 점점 더 신중해졌다. 영화평을 꼼꼼히 챙기고 주변의 입소문까지도 두루 점검한 뒤 영화를 고르는 습관이 생겼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괜찮은 영화를 함께 볼 가능성이 높아졌고, 미리 얻은 배경 지식으로 영화를 보고 난 뒤 커피 한잔 마시며 젠 체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어쩌면 지금 내가 영화로 글을 쓰고 먹고 사는 데는 이런 습관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연애 과정에서 어떤 영화를 함께 봤느냐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극장에서 단지 시간을 떼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적어도 연인들끼리는 “재미 없다 또는 “재미 있다” 정도의 대화만으로 끝낼 영화는 그리 훌륭한 데이트 재료가 못 된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감히 조언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만나는 이성과 정말 잘되고 싶다면, 얘깃거리가 풍성한 영화를 고르라고 권하고 싶다. 네티즌 평점 같은 거 말고, 볼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나 리뷰를 어느 정도 입수해 놓는 것은 필수다. 영화를 본 뒤 감동과 여운을 함께 곱씹으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 상대방은 당신의 남다른 문화적 감수성과 반짝이는 눈빛에 매료될지도 모른다.






 



[ⓒ 인터파크도서 북DB www.book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니스트 최광희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된 영화들을 잘근잘근 곱씹어 봅니다. 조금은 삐딱하게, 하지만 열정적으로

라디오여, 4분짜리 음악을 허하라! 2009.07.21
장마철에 더욱 심해지는 습열병, 아토피, 장염 2009.07.20
댓글 주제와 무관한 댓글은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