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베스트리뷰

수상작
2015년 01월 3째주
  • 도덕적 양극이 모이면 나쁜 효과가 나타나는 이유아스피린79 | 2015/01/25

    나는 심리학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영역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가끔 신문사회면을 장식하는 패륜범죄나 뉴스, 인터넷보도로 접하게 되는 감동적인 사연등을 보며 일차적으로 느끼는 안타까움, 존경심 외에 학문적으로 그것들을 파헤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곤 한다. 이 책은 그러한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른 행동을 하게 되는 사람의 심리, 배경, 사회적 지위등의 수많은 조건화가 끼치는 영향을 실험을 통해 알아보고 도덕성에 관련된 우리의 고정관념을 조금이나마 바로잡아 주는 교정서라고 할 수 있겠다.우리는 나 자신에 대한 도덕성을 깨우치기 시작하는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이상하리만치 타인보다 본인에 대해 도덕적으로 관대한 면이 있다. 상황적으로 그럴수밖에 없었다거나 상대방의 의도가 처음부터 나빴다거나 하는 이유를 대며 종종 나는 다른사람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또한 외모나 말씨, 학벌과 지위에 따라 어떤 사람을 표면적으로 좋고 나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투명사회'라고 불리는 요즘, 자신의 모든 신상이나 인터넷에 남긴 흔적등이 맘만 먹으면 네티즌수사대에 의해 털릴 수 있는 감시체제에서 우리는 항시도 맘의 고삐를 풀지 않고 도덕적으로 신중한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에 직면해 있다. 과거 지하철막말녀나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땅콩회항', '갑질논란'등의 사건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사람이 윤리적으로 어긋난 행동을 하는 순간 다수의 악플과 논란을 피해갈 길이 없는 것만 봐도 연예인, 공인이라서 몸을 사리고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이젠 일반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 것 같다. 누군가 늘 지켜보고 있다는 이런 감시효과는 확실히 사람들이 도덕적 규칙을 위반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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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다샤덴프로이데 | 2015/01/20

    택배로 책을 자주 받게 되는데, 택배 기사 분들은 보통 열린 문틈으로 책을 밀어 넣다시피 해서 고맙다는 말을 해도 별다른 반응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린다. 반면 우체부 아저씨는 책이 자주 오는 것 같다며  빨리 읽을 수 있게 일부러 일찍 갖다 주는 거라는 농담도 곧잘 한다. 그런데 무뚝뚝한 택배 기사분과 친절하고 넉살 좋은 우체부 아저씨 둘 중 어느 쪽이 더 편하냐 하면 예상 외로 택배 기사분이다. 가끔 후줄근한 차림으로 택배를 받을 때는 차라리 모르는 척해 주는 게 괜히 말을 걸어 오는 것보다 덜 창피하기 때문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안 보면 그만이니까 덜 신경 쓰이지만, 노래 가사처럼 '아는 사이인듯, 아는 사이 아닌, 아는 사이 같은' 애매한 관계가 되면 불편해진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나에 대한 데이터가 임시 파일이 아닌 별도의 폴더에 저장된다는 건 은연중에 내가 평가받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보다 두 번 이상 보는 사람이 더 어렵다.'소심함', '수줍음'이라는 말보다 '내성적'이라는 표현으로 나를 정의했던 데에는 조금이라도 덜 약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반영됐는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에게나 어울리는 말보다는 고상해 보이는 표현이다. 이렇게 내 머릿속에서만 사용할 단어인데도 남들이 어떻게 볼지를 먼저 따지는 걸 보면 지나치게 병적으로 남을 의식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자체 내장 CCTV 덕분에 어디 가서 나쁜 짓 안 하고 다니는 건 다행이지만.   사회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다. 능력있어 보이고 싶고,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으로 평가 받고 싶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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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지금 짐승이다.jjolpcc | 2015/01/22

    설경(雪景).  반가웠다. 10년을 훌쩍 넘기고 돌아온 고향. 눈 내린 산은 예전 그대로다. 5층짜리 건물이 최고층의 위세를 떨쳤던 시절은 가고 고향에도 10층 이상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래도 읍을 둘러싼 높은 산들이 자랑하는 설경은 그대로다. 변치 않는 것이 있을까마는 변치 않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복 받은 일이다. 제설차량이 도로의 눈을 순식간에 치워버리다 해도 산을 덮은 눈은 그러지 못하리라. 제아무리 인간이 주인이라는 세상이라지만 고작 인간이기에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듯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고작 인간이기에 몽매한 인간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변치 않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서슬 퍼랬던 군부독재 시절을 온몸으로 대항했던 많은 이들은 아름다운 설경이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 곱씹어도 변하지 않는 그들의 삶은 그래서 고맙다. 습관처럼 들락거리는 도서관에서 발견한 만화책 한 권이 고맙고 반가웠다. 아니 괴롭기도 했다. “아트 슈필겔만”과 “케테 콜피츠”를 동시에 만난 듯 작가 박건웅의 그림은 어둡고, 무거웠으며 눈이 아닌 가슴을 파고드는 강렬함을 지녔다. 분량이 상당했지만 오랜 걸리지 않았다. 편하게 살아왔고, 나름 짐승이 아닌 사람대접을 받으며 살아온 내게 지독한 고문의 이미지들은 환상처럼 다가왔다.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이기까지 한 고문의 프로세스는 그저 현실과 거리가 먼 영화의 한 장면 장면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이렇게 난 인간에서 멀어지는 것인가?    짐승의 시대에는 인간임에도 인간 아닌 짐승의 삶을 강요당한 사람들에겐 현실이 비현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짐승의 시대에는 짐승 아닌 인간으로 산 사람들에게도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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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빈 잔의 시놉시스미현수로 | 2015/01/22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숙소에서 잠시 짬을 내어 한림읍 협재해변에서 비금도를 바라보며 성난 파도를 바라보다 문득 이석규시인의 바다를 그려본다. 바다는 많은 것을 품어내고 내색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포효한다. 세찬 바람에 파도와 포말로 성을 내 보지만 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바다 넘어 시인의 등대와 섬, 우체국 그리고 고향과 그리운 어머니를 보게 된다. 엉클어진 마음 바람에 날리고 일어서 새롭게 시작하는 바다 그래서 어머니를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인은 바다를 시작으로 항구로 물레방아로 연꽃으로 성장해 도시로 나아갔을 것이다. 도시에서 그는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애닮은 매미 울음에서, 쑥버무리, 유채꽃, 고추잠자리에서 추억을 그리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차려놓은 밥상에서 발견하는 어머니의 땀방울과 적삼과 치맛자락 허리끈마저 나풀나풀 풀어진 모습에서 발견하는 삶의 노곤함과 피곤함, 자식에게는 밥을 주고 자신은 들에서 뜯은 쑥에 대충 밀가루 듬성듬성 뿌린 버무리로 요기하며 환한 미소 보내는 어머니 “쑥버무리”에서 발견하는 회한과 후회 그리고 마음 중앙에 두고 살아가는 고향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고향을 찾았을 때 볼 따귀에 딱 붙어있는 쑥 하나가 그리울 때 그리운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니 않을 때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바다에서 찾게 된다. 목 놓아 울고 싶을 때, 삶이 무료한 때, 찾아간 그곳에서 시인은 어머니를 보았던 것 같다. 바다 넘어 그곳에는 섬이 있고 쓸쓸이 자리를 지키는 등대가 있어도 닿지 마음속에 있는 소식을 알려줄 우체국, 기다려도 도착하지 않는 소식에 대한 초조함도 보게 된다. 그리움은 어머니 볼 따귀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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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속 죽음을 통한 죽음의 통찰미스터베어 | 2015/01/20

    자신의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작던 크던 누구나 가지고 있다. 아무리 인간이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있고, 죽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지라도. 그럼 인간은 언제부터 죽음을 인식하게 될까? 나는 당연히 있어야할 누군가의 부재 즉, 가족이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을 더이상 볼 수 없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이나 삶에 대한 애착에서 오는 두려움, 고통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처음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현실이 아닌 허구라는 것을 알지만 드라마나 책에서 자신이 특별하게 생각했던 등장인물의 죽음은 허무하고 안타깝다.그 안에서 비슷한 상실감을 느끼는 것도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부터 많은 철학자, 종교인, 예술가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나름대로 정의내렸지만, "죽음"은 원래 산 사람들이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나 이별처럼 겪은 일,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닌, 산 자는 절대 겪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간접경험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간접경험을 통해 죽음을 상상하고 두려워한다. 죽음 후에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며 내 존재가 사라짐에 공포를 느낀다. 죽은 자는 죽음이 어떻다고 말을 할 수 없고, 산 자는 죽어본 적이 없어 말할 수 없으니 아이러니 한 일이다. ​ 이렇듯 누구도 알 수 없는 죽음이지만, 문학은 죽음을 여러형태로 표현한다. 비유나 은유적으로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초월한 무언가로 상상하기도 하고, 시체의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외국이던, 한국문학이던 죽음은 작가에 의해 달라진다. 작가가 그 죽음으로부터 보여줄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다루는 비중도 달라지고, 표현의 강도도 달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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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거침없는사내 | 2015/01/20

    어린 시절 치매로 인해 노망이 나신 할머니를 5년간 수발하시면서 고생하셨던 어머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대소변을 못가리시다 보니 아무리 잘 수발하셔도 어쩔수 없이 집 마당에 들어서면 풍겨오는 악취는 물론 예전의 할머니가 아닌 듯 헛소리를 연발하시는데서 느꼈던 어린 시절의 공포는 죽음에 대한 이질감 자체였다. 하지만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우리들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바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아닐까? 게다가 날 낳아 주시고 키워주시며 우리들의 삶으로 인해 희노애락을 느끼셨던 부모님의 죽음은 그 어떤 슬픔보다 더 큰 상실감과 후회, 회한으로 작아져만 가고 침몰해 가는 자신을 느낄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머님의 별세는 이러한 크나 큰 상실감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별다른 효도도 못해드렸고 그렇다고 속을 썩이지도 않았지만 늘 가슴 졸이게 했던 못난 막내 아들이 처자식을 돌 볼 나이가 됐음에도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못내 걱정이셨는지 처연히 바라보시던 마지막의 모습은 지금도 사회생활에 찌들어 매정해 진 내 가슴속을 사정없이 휘몰아 친다.   돌이켜 보면 세상과 이별하는 어머님이 시간동안 병간호하던 우리 형제들에게도 숱한 슬픔과 인생에 대한 한층 성숙해진 사유, 그리고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아픔 속에서 또 한분을 언젠가 보내야 할 때가 돌아올 경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서로 말하진 않아도 마음속으로 차분하게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82세의 현재까진 정정하시지만 언젠가 또한번 우리에게 다가올 그 순간을...   그래서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부모님을 떠나 보내면서 느꼈던 심적 동질감을 확인하고 또한 아버지의 운명을 언젠가 맞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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