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연재

제8화

2017.12.08

부러진 코를 위한 발라드 | 아르네 스빙엔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만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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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급. 코치는 나를 플라이급에 배정했다. 플라이급이라면 파리처럼 가볍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나는 모기급에 배정받아도 좋을 거다. 플라이급 선수들의 체중은 48에서 51킬로그램 사이다. 지금 내 몸무게는 36.5킬로그램. 몸집이 작은 사람들의 장점은 움직임이 날렵하다는 것이다. 코치가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나도 그 장점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잘했어, 바르트. 이제 팔굽혀펴기 50번 실시!”

 

코치에겐 아무 문제도 없다. 그는 단지 내가 플라이급의 다른 선수들처럼 복싱다운 복싱을 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가끔 나는 이불을 덮고 누워 내 몸이 길가의 민들레처럼 쑥쑥 자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럼 어느 날 갑자기 무하마드 알리처럼 자라 낯선 외국에서 온 거대한 몸집의 선수들을 케이오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잘하고 있어, 바르트! 조금만 더 템포를 빨리 해 봐.”

 

복싱은 ‘고귀한 방어 기술’이라고 말들 한다. 그렇지만 복싱 경기에선 상대방을 때려눕혀야 승자가 될 수 있다.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바로 그거였다. 조금만 더 노력하라는 말. 나는 매번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충분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크리스티안과 2회전 정도 연습 게임을 했다. 우리는 동갑이지만, 그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내게는 너무나 생소한 근육이라는 것도 가지고 있다. 크리스티안은 꽤 괜찮은 애다. 함께 연습할 때도 나를 때려눕히려고 속임수 따위를 쓰지는 않는다. 코치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때에도 말이다.

 

복싱 연습을 할 때는 경기 중에 케이오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선수들의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체육관에서는 오직 세계적으로 유명한 복싱 선수들, 경기에서 승리해 그 어떤 바지에도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벨트를 상으로 받은 영웅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나는 아이들에게서 가끔 ‘헐~’ 소리를 들을 때는 있지만, 그 누구도 나를 정신지체아로 취급하진 않는다.

 

“어때?”

 

벽에 붙어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자, 크리스티안이 말을 걸어왔다.

 

“그냥 그래.”
“눈은 꽤 좋아진 것 같은데.”
“응.”
“학교에서 너를 괴롭히는 애들이 있니?”

 

크리스티안은 페북 친구이긴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래서 갑작스런 그의 질문은 마치 예상치 못한 어퍼컷처럼 느껴졌다.

 

“어…… 아니……?”
“그래? 혹시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당장 나한테 말해.”
“응, 알았어.”

 

솔직히 이건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다. 크리스티안이 우리 학교로 와서 아우구스트나 요니 같은 애들을 때려눕힐 수만 있다면.

 

선생님은 극한의 추위에서 몸을 녹이려면 바지에 오줌을 싸면 된다고 말했다. 그건 당장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티안은 한 두 번쯤은 나를 도와줄 수 있겠지만, 필요할 때마다 매번 나를 도와줄 수는 없다.

 

크리스티안이 몸을 일으켜 샌드백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허공에 대고 샌드백을 치는 시늉을 했다.

 

“바르트, 시간이 되면 나랑 잠깐 얘기 좀 할까?”

 

연습이 끝나자 코치가 말했다.

 

나는 코치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 작은 의자에 앉았다. 벽에는 조지 포먼, 슈거 레이 레나드, 알리와 같은 유명한 복싱 선수들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코치는 알리가 복싱계에서 가장 큰 영웅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영웅으로 남을 거라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코치가 그 말을 한 것도 꽤 오래전 일이다.

 

나는 팔로 땀을 문질러 닦고 복싱 장갑을 벗었다. 코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말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내 바람이 있다면 모든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더 좋은 세상으로 변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코치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알리가 한 말이란다. 너도 알다시피 그는 이런 말도 했지. 링 위에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상대방을 쏠 거라고 말야.”

 

그것은 코치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 하는 말이었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 링 위의 선수들에게도 항상 이 말을 해 주었다.

 

“멍든 데는 이제 좀 나아 보이는구나.”
“네.”
“그건 그렇고…… 바르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앞으로도 계속 복싱을 할 생각이니?”
“저는 연습에 매번 꼭꼭 참석하잖아요.”
“그래, 그렇지. 내 말은, 너의 태도와 성의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엔 말이지…… 너한테는 복싱 말고 다른 스포츠가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

야…….”

“예를 들면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 예를 들면 스키점프 같은 종목…….”
“스키점프요?”
“응. 넌 몸이 꽤 마른 편이잖아. 스키점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컬링도 좋을 것 같고.”

내가 스키점프나 컬링을 한다고 하면 엄마가 못마땅해 할 것이 틀림없다. 혹시 아이들이 나를 괴롭히면 컬링스톤으로 방어를 해야 하나? 코치는 내가 복싱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복싱을 그만둘 수 없다. 복싱을 그만두면 엄마는 하늘이 꺼질 듯 낙심할 테니까.

 

“혹시 엄마가 월 회비를 내지 않았나요?”
“아냐, 그런 건 아냐.”
“살면서 무언가를 시도해 보지 않는다면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무하마드 알리도 말했잖아요?”
“음…… 그렇지…… 그럴 수도 있을 거야.”
“지금 복싱을 그만둘 수는 없어요.”
“아주 좋은 태도야. 하지만 복싱을 하려면 상대를 때려야만 해. 설사 그럴 마음이 없더라도 말이지.”
“그래요?”

 

나는 코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상대를 치려고 하지 않아.”
“하지만 방어만큼은 자신 있어요.”
“그것도 좋긴 한데 말야…… 가끔은 상대를 때리기도 해야지…….”
“그렇다면…… 조만간 그렇게 해 볼게요.”
“그게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복싱을 그만둘 마음이 없다는 뜻이지? 내 생각엔 핸드볼도 좋을 것 같은데…….”

 

코치는 내 맘이 상하지 않도록 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결국 우린 지금 다른 스포츠를 시작하는 건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좋아요. 같은 결론을 내렸으니 됐어요.”
“그렇다면 너도 이제 방어만 하는 복싱에서 벗어나야지?”
“네, 조만간.”

 

코치의 사무실에서 나온 나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탈의실로 갔다. 물론 코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복싱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주먹질을 할 마음이 없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언젠가 코치가 해 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프리카의 어느 도시에서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이 경기를 할 때였다. 알리는 링 위에서 춤을 추듯 포먼의 주위를 빙빙 돌며 그의 주먹을 피했다. 그러면서 포먼의 힘을 빼놓았고 결국은 한 방에 그를 거의 링 밖으로 날려 버림으로써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나도 알리처럼 훌륭한 복싱 선수가 될 수 있는 거다.

 

아, 생각만으로야 무슨 일을 못 할까.

 

엄마는 저녁 내내 집에 있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여자에 대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았다. 그 여자는 중국에 살고 있었고,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생활했다. 그런 프로그램을 보니 괜히 기분이 축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잠자리에 든 나는 아다에게 준 시디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지 말고 혼자만 들어야 한다고 계약서라도 작성해 놓을걸. 괜한 짜증에 뒤척이던 나는 엄마가 잠든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을 끈 후에도 나는 엄마의 코 고는 소리와 이 가는 소리를 오랫동안 들어야만 했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무모한 일을 저지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행기도 아니고 유에프오도 아닌 별똥별에 대한 생각을 미처 하지도 못하고,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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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네 스빙엔

1967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문학잡지, 음악잡지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문학 계간지, 번역 계간지 등에 칼럼을 쓰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1999년에 작가로 데뷔했다. TV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뉴욕 영화가에서 일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는 특정한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연령층을 오가며 여러 장르의 책을 꾸준히 썼는데, 특히 어린이·청소년 소설에 두각을 나타냈다. 데뷔작인 휴버트-시리즈는 만화영화로 제작되어 핀란드와 스칸디나비아 3국의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2012년 출간된 [부러진 코를 위한 발라드]는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며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노르웨이 문화예술부 문학상을 비롯해 프랑스, 벨기에, 미국 등지에서 문학상을 수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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