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연재

제21화

2017.06.28

우리가 녹는 온도 | 정이현
커피 두 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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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커피 두 잔

 

 

(3)

늘 새기는 말이 있다. 한 권의 책을 백 명이 읽었다면 모두 백 개의 텍스트가 된다는 말. 다들, 따로따로 읽는다. 따로따로 느낀다. 개별적으로 살고, 개별적으로 사랑한다. 이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별에 이르는 과정, 이별을 결심하거나 받아들이는 마음, 이별과 대결하는 태도도 모두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주 특별한 방식의 이별이라고 해도 결국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추측한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이별이라는 점, 온전히 그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이렇게 막을 내리는 동화는 현실에 없다는 것을 이제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무대가 분홍색 막으로 덮이고 난 뒤에 본격적인 생활이 시작된다. 백설 공주도, 개구리 왕자도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장을 봐야 하고 밥을 지어 먹은 다음 설거지를 해야 한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건조대에 널어 말린 다음 잘 개어 서랍에 넣어야 한다. 집 안의 먼지를 청소기로 빨아들이고 물걸레질을 한 다음 더러워진 걸레를 빨아야 한다.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생활 속으로 돌입한다는 뜻이고 그 안에서 범속한 일상들이 되풀이된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고, 양가의 경조사를 챙겨야 하고,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 그 세월의 더께 속에서, 실은 두 사람이 최초에 무척 특별한 감정으로 맺어졌던 관계임을 상기할 여력은 없다. 욕실의 타일 줄눈이 더러워지는 것처럼 어떤 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서서히 일어난다.
삶의 무게가 두 사람의 어깨에 고르게 배분되면 이상적이겠지만 사람끼리의 일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 때론 어깨가 무겁다는 것보다 내 쪽이 더 무겁다는 사실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힘들게 만든다. 너무도 바쁘고 정신없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차가운 커피를 좋아하는지 뜨거운 커피를 좋아하는지 낱낱이 기억할 여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차가운 커피와 뜨거운 커피 따위가 도무지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어떤 이에게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무엇이 치명적인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누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나는 요즘 꽤 자주, 그 사소한, 커피의 온도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마다 혀끝의 온도가 다 다르다는 것에 대해. 한 사람을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키고 위안을 주는 온도가 제각각이라면.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말고 단 한 사람쯤은 나만의 그 온도를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정환과 은영의 커피 두 잔 사이에 가로놓인 20여 년의 시간을, 부러 비워놓았다.
어떤 관계에도, 어떤 글에도 처음과 끝이 있다. 그 중간을 채우며 만들어가는 것은 작가의 일이 아니라 인물들의 일이라는 생각에 점점 더 짙은 확신이 든다.

※ 정이현 작가의 ‘우리가 녹는 온도’ 연재는 이번 회를 끝으로 종료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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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현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짧은 소설 <말하자면 좋은 사람> 산문집 <풍선> <작별> 등을 펴냈다. 2004년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을 받았다. 2006년 <삼풍백화점>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해에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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