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연재

마치며

2014.10.01

나는 힘이 세다 | 안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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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지금 저 남쪽에서는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며칠째 저는 태풍을 대비한 준비에 분주했습니다. 토마토며 고추, 깻잎에 지지대를 세워주고, 거름도 주었습니다. 비가 흘러내릴 도랑도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앵두를 따는 날입니다. 청명에 수 천 송이의 흰 꽃을 피워낸 앵두나무는 망종이 되자 그 꽃자리마다 붉은 열매를 품었습니다. 복사꽃은 화려하게 꽃단장한 게이샤의 분 냄새를 풍기지만 앵두꽃은 처녀의 순한 살 냄새를 풍깁니다. 앵두꽃은 멀리서 보면 흰 꽃무리처럼 보여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연한 분홍이 슬쩍 번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앵두꽃이 음전한 처녀의 빗장뼈처럼 보인다고 하면, 선생님께서는 앵두꽃에 쇄골이라니 엇박자라 하시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음전한 처녀라 하더라도 저 춘심의 자맥질이야 모르지는 않을 테지요. 처녀의 쇄골이 드러내는 날카로운 각도와 깊은 우물은 저 춘심보다 더 깊은 무엇을 담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우리 가요에서는 우물가에 심은 앵두나무 때문에 동네 처녀들이 바람났다고 했습니다. 물동이며 호미를 모두 팽개치고 저 대처의 휘파람을 따라 떠난 처녀도 있다지만, 저 나무처럼 조용히 앵두를 만드는 일만 열중인 나무도 있는 것입니다.   다른 열매에 비해서 앵두는 무척 무르고 연합니다. 그래서 앵두를 딸 때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놀려야 합니다. 무디고 거친 헛손질에는 앵두가 물러 터져버릴 테니까요.


가지 속속들이 매달린 앵두를 다 따려면 품이 많이 들고,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저는 송이송이 열린 앵두들이 왜 모두 미니픽션처럼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미니픽션을 쓴다고 했을 때, 선생님은 제대로 된 작품을 쓰지 못할까봐 걱정하셨습니다. 큰 작품은 끈질기게 붙어서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짧은 글을 쓰면 그 에너지가 모두 작은 작품으로 새버릴 것이라고 충고하셨지요. 문학에 일생을 건 선생님의 충고는 문학과 제자에 대한 애정 어린 근심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친구는 단편이나 장편에 자신이 없으니 샛길로 샌다고 했고, 짧은 작품 하나를 쓰고 만족하는 사람들의 게으른 작업이라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면서 긴 작품에 몰입할 시간이 부족했던 저에게는 미니픽션이 최적의 장르였습니다.


짧은 시간에 응축된 에너지를 쏟아 부어 쓴 미니픽션은 저의 혼이 고스란히 담겨졌습니다. 저의 앵두 한 알 한 알은 단편의 부분이고 또한 장편의 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대학에 들어간 지금, 저는 그 앵두 하나하나를 풀어 단편도 쓰고 장편도 쓰고 있습니다. 물론 앵두 한 알이 완벽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앵두 한 알이어야만 완벽한 작품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쓴 미니픽션에서 춘앵전의 극치에서 짓는다는 웃음, 무대판 염화미소라는 ‘미롱(媚弄)’을 보기를 기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과한 욕심일까요? 모든 감정을 내보이며 활짝 웃는 웃음이 아니라, 한과 절망과 기쁨과 희망이 뒤섞인 변증법적인 미소라는 ‘미롱’이야말로 미니픽션에서 보여줄 수 있는 극치의 미라고 저는 믿습니다.   수박처럼 큰 것도 아니고 적어도 참외만은 해야지, 앵두는 참 먹을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앵두나무에서는 앵두가 열리는 법입니다.


저 작은 열매를 드러내려고 앵두나무는 참외나 수박보다 더 치열하게 물을 끌어올렸고, 저렇게 붉은 정열을 나무 하나 가득 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옛 어른들은 판소리 공연을 할 때, 공연자의 노래가 멋들어지고 그 사람만의 그늘 우거진 소리가 깃들었으면, 귀명창들이 ‘앵도를 똑똑 딴다!’고 평했다지요. 그 때의 앵도가 바로 앵두이며, 구슬처럼 완전한 소리, 붉은 정열이라는 뜻이라 들었습니다. 붉고 동그란 앵두는 시고 달며 씁쓰레한 맛이 느껴집니다. 작품에 담아야하는 뜻 또한 그러하지 않은지요. 시고 달며 쓴 그런 글말입니다. 지금 저토록 붉고 화려하게 많은 열매를 달고 있지만 앵두나무에는 꽃이 피는 봄과 열매를 맺는 초여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 앵두를 맺기 위해서 앵두나무는 지난하고 매서우며 두려운 겨울을 버텼다는 사실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저는 붉은 열매를 가득 달고 고요히 서 있는 앵두나무, 그 너머를 바라보게 됩니다. 참, 어둠이 내리기 전에 매실도 따야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군요. 이번 태풍이 몰고 오는 비가 지나가면 참외며 수박도 무럭무럭 자랄 것입니다. 때가 되면 저도 큰 열매도 수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풍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비와 바람에 열매 몇 개가 떨어질 테지만, 그것을 견딘 열매들이 남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저는 비가 흘러내릴 도랑을 넉넉히 깊게 파두었습니다.  

이른 더위에 선생님은 건강하신지요. 선생님을 뵌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시다는 말을 듣고도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제 앞가림하기에 바쁜 핑계로 무심하고 못난 저를 용서하세요. 작년에 비해서 올해는 앵두가 두 배쯤 더 열렸습니다. 앵두로 효소를 담아야겠습니다. 효소가 스스로 발효되어 익고 앵두의 붉음이 정열의 빛깔을 띠게 되는 날, 선생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몸 건강하세요, 선생님.


안영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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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실

1996년 문화일보 중편소설 <부엌으로 난 창>으로 등단 2013년 창작집 <큰 놈이 나타났다> 2013년 프랑스 éditions Philippe Rey에서 공저 출간. 2014년 인터파크 도서 북DB에서 연재 중 문화일보 동인집 공저 4회 참여 미니픽션 동인집 공저 6회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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