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꽃제비, 자유를 갈망한 이름 등록일 | 2013.07.05 조회수 | 4,906

꽃제비란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지기까지

 

 

꽃제비 어원에 관한 이야기

 

‘꽃제비’라는 말은 처음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 어원에 대해 처음으로 근거를 들어 설명한 자료는 2001년 평양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출간한 <열병광장>이라는 장편소설이 유일하다. 이 책에서의 주장을 보면 1945년 해방공간에서 소련 사람들이 당시 떠돌아다니는 부랑자들을 ‘꼬체비예’라고 불렀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이 ‘꽃제비’라고 제멋대로 해석해 부르면서 이 용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어원에 관한 설을 정설로 받아들일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불렸다면 1980년대까지 이 용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꼬체비예’설을 주장한 <열병광장>을 단순한 역사 소설로 보기 어려운 점들을 짚어보면 이 소설 속 용어를 어원으로 인정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이 소설은 김일성을 중심축으로 한 항일 빨치산의 유격대 활동과 해방 이후 국가 건설에 관한 북한 역사를 다룬 작품군의 하나다. 해방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이 창작된 시기는 2001년이다. 북한은 1997년 이후 유엔으로부터 북한아동인권에 대한 압박을 받아왔다. 안으로는 꽃제비 단속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꽃제비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던 북한은 <열병광장>을 통해 꽃제비의 존재를 부정하려 했던 것이다.

 

1990년대 초부터 꽃제비들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한 ‘꽃제비’에 관한 의미는 “꽃 피는 봄이 오면 찾아오는 제비”라는 뜻이었다. 꽃제비가 꽃 피는 봄에 많아지는 것을 보며 그들이 항상 따뜻한 곳을 찾아 떠돌며 집을 그리워하는 제비라고 해석한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는 거지가 부정적인 용어라서 역설적인 용어로 꽃제비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중국의 ‘화자(花子)’설이 있는데 이것 역시 아무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설’만 난무할 뿐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꽃제비’는 그들 사이에서 일컫는 의미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 사회에서 꽃제비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나

 

꽃제비는 집단체제인 북한 사회에서 사실상 가장 큰 피해자인 동시에 그 체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가장 저항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당국은 1950년대 6.25 전쟁으로 생긴 고아들을 소련, 중국, 루마니아 등 사회주의 국가들에 위탁양육을 보냈다. 하지만 1950년대 말 북한체제가 안정을 이루면서 이번에는 계획경제 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해야 했다. 외국으로 보냈던 고아들을 다시 데려왔고 북한당국은 이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해 ‘학원’이라 부르는 고아원을 대대적으로 늘렸으며 1960년에는 ‘더 이상 거지도, 류랑자도 없다’고 단언했다.

 

1960년대

 

김일성의 주장과는 달리 1960년대 말에 류랑자, 방랑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6.25 전쟁 이후 이들이 다시 등장한 이유는 북한당국의 정치적 탄압에 의해서였다. 1950년대 후반 김일성에게 도전할 수 있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불순분자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신분조사를 실시하였다. 대상자는 처단하거나 산간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당 관료를 대상으로 했던 이 신분조사사업은 1960년에 완료되지만, 그 이후에는 대상을 일반인으로 확대해 실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 사회에는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이 생겨났으며 이 과정에서 가정불화, 가정해체 등이 일어나 청소년들의 일탈현상이 나타났다. 핵심계층에는 혁명가와 유가족, 영예군인, 접견자, 영웅 및 공로자, 제대군인 등이 속한다. 동요계층은 중간계층으로 순수 노동자, 농민, 인텔리로서 정치적인 문제가 없으나 핵심계층에 속하지 않는 주민들이 그 대상이 된다. 마지막으로 적대계층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있는 계층으로 지주 및 자본가와 그 가족, 부농, 월남자, 친일파 등이 포함된다.   

 

당시 북한에서 신분문제는 가족 내에서 서로 다른 신분에 의한 사회적 차별문제로 확산되었다. 한 가족 내에서 남편이나 아내, 어느 한쪽이 적대계층에 속하게 된다면 출셋길이 막혀버린다. 따라서 당시 가족 안에서도 서로 신분이 다른 경우 이 문제로 부부간에 폭행이나 폭언 등과 같은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문제가 심각하게 치닫게 될 경우 이혼하는 가정도 많았다. 이 과정에서 이들 가정의 자녀들은 학교와 집, 어느 곳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랑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처럼, 1960년대 꽃제비들은 정치적인 신분조사사업에 따른 피해자들이었다.

 

 

1970년대

 

사상교육을 시키고 육체적 노동을 강화했지만 1970년대 꽃제비는 북한 사회에서 계속 나타났다. 당시는 김정일의 후계자 구축을 위한 사업이 본격화되던 시기로 꽃제비에 대한 문제는 큰 골칫거리였다. 불량 학생 또는 방랑생으로 불리던 꽃제비들은 지방뿐 아니라 수도인 평양에서도 적잖이 나타나 김일성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당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김일성은 이들을 따로 모아 관리할 고아원의 필요성을 느낀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74년 처음 ‘계부모 학원’이 등장한다. 고아원을 학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과 수령이 고아의 부모이니 이들은 고아들이 아니라는 것’에서 비롯된 학원개념이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고아원이라는 용어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고아들이 불렀던 노래에는 이런 노래가 있다.

 

“부모 잃은 아이들을 고아라 하였지만, 햇빛 안고 사는 우린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에 아    버진 김일성 장군님, 아~아 아버지 우리에 아버지…….”

 

당시 불량 학생 혹은 방랑생들 중에는 1960년대 신분조사사업으로 부모가 이혼했거나 재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많았는데 김일성은 이 아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이런 계부모 학원을 내오도록 지시한 것이다. 계부모 학원은 기본적으로 학습공간과 생활공간을 함께 갖춰 놓고 학생들의 사적인 활동이나 자율시간은 허용하지 않았으며 철저한 통제를 통해 아이들을 관리했다. 원생이 고아원 밖으로 나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계부모 학원은 곧 꽃제비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 꽃제비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존재로 억압되어 왔다. 고아원 출신은 당에 입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좋은 직장이나 학교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사실상 갖지 못하는 심각한 차별을 겪어야 했다.  

 

1976년에 ‘판문점 도끼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강제 이주의 시련이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을 계기로 내부의 저항가능성을 의식한 북한당국은 불량자 또는 신분이 낮은 계층을 강제로 이주시킨다.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지역의 적대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함경북도 지역으로 강제로 보내버린다. 이렇게 일반 주민에 대한 강제 이주는 이 사건이 일어난 1976년 이후부터 198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강제 이주된 주민의 가족과 자녀들이 새로 이주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꽃제비생활을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1980년대

 

198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량행위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비사그루빠’가 만들어졌고 부랑자, 방랑자, 불량 학생 등 비사회주의적 행동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 나갔다. 비사그루빠는 비사회주의 행위를 단속하는 그룹을 말하는데, 비사회주의적 행동이란 북한이 정한 제도적, 법적 기준 이외의 활동 또는 행동을 지칭하는 것이다. 집단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모든 개인주의적 행동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비사회주의적 행동에 대한 단속반이 바로 ‘비사그루빠’라고 하는 단속전문기관이며 이 기관은 중앙당 직속기구로 설치되었다. 이들의 통제 대상은 성인뿐만 아니라 불량 학생으로 지칭되는 청소년층의 사회질서 이탈 문제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탈 학생들 사이에서는 꽃제비 행위나, 비사회주의적 행동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 사회질서에 참여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 인터파크도서 북DB www.book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니스트 김혁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소년 시절 꽃제비로 떠돌며 방랑 생활을 했다. 배가 고파 식량을 구하러 중국을 넘나든 것이 그토록 큰 죄가 될 줄 몰랐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어렵다는 함경북도 회령 전거리 제12교화소에서 인간 삶의 밑바닥을 경험하면서도 그는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2001년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북해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의 모습은 한때 그가 그리던 모습과 다른 부분도 있어 혼란스러운 시절 또한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책을 집어 들었다가 학문에 눈을 떴다. 국사학과 북한학을 전공했으며 국내 최초의 꽃제비에 관한 논문 ‘북한의 꽃제비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제 완전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앞으로 북한학 전문가로서의 길을 걷는 것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믿는다. 그는 현재 통일·교육위원 전문 강사로 일하고 있다.

[프롤로그] 책과 영화 그리고 음악에 대한 두 기자의 소소한 수다 시간 2013.07.05
[프롤로그] 그동안 우리에게 꽃제비는 무엇이었는가 2013.07.05
댓글 주제와 무관한 댓글은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