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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M흥업의 삐딱한 시선 등록일 | 2009.02.20 조회수 | 5,749

바다를 건너와 뒤바뀐 영화 포스터들

춘추시대 제(齊)나라 재상인 안영은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生淮南 則爲橘 生于淮北 則爲枳)’고 말하여 제나라를 낮추어보려던 초(楚)나라 영왕을 꾸짖는다. 이 말은 환경이 달라지면 그 사물 또한 본질이 흐트러질 수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곤 한다. 해외에서 수입된 많은 영화들 중, 한국에 와서 탱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마케팅 전략이 안전제일주의인 탓에 영화의 본질을 무시한 채 특정 장르로 귀속시키거나, 과거 성공하였던 영화의 아류작으로 포장해버리는 일이다. 모든 판타지물은 반지의 제왕의 아류작으로 둔갑하며, 모든 연애물은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 혹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한 채 시장에 등장한다.

한국에서 소개되는 해외 영화 포스터에는 몇 가지 법칙이 존재한다. 여백의 미를 허용하지 않으며 가급적 큰 글씨를 중앙정렬로 배치한 다음, 빈 공간 사이사이에 원본에는 없던 상투적인 태그라인(카피 혹은 슬로건을 의미)를 삽입하는 것이다. 로맨틱한 영화는 ‘가슴 따뜻한 러브스토리’, 스릴러는 ‘숨막히는 진실’, 액션물은 ‘가공할 액션’, ‘기상천외한 범죄’와 같은 표현이 절대 빠지지 않는다. 시대극에는 ‘대서사시’가 들어가며, 개봉날짜을 알려줄 때에도 ‘올 겨울 따듯한 사랑이야기가 찾아옵니다’, ‘10월! 액션 블록버스터가 온다’와 같은 적극적인 마케팅용어가 빈번히 등장한다. 모두 흥행에 실패할까 두려운 투자자의 심리가 반영된 결과이다. 관객이 이미 관심을 가지고 있는 초대형 블록버스터나 슈퍼히어로물, SF영화 등은 상대적으로 마케팅 부담이 적고, 그 때문에 원본 포스터를 크게 바꾸지 않는 선에서 한국판 영화 포스터가 제작된다. 그러나 마케팅 포인트가 애매한 영화(유명한 배우가 등장하지 않거나, 장르 구분이 어려울 때)의 경우에는, 원본과는 거리가 먼 한국판 포스터가 제작된다.

2월 19일 개봉 예정인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영화 포스터를 비교해보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파악할 수 있다. 원본 포스터는 두 주인공의 사진 아래쪽에 오른쪽 정렬로 영화 제목과 세부 정보사항을 구성하고 있다. 글씨는 모두 회색이며 검은색으로 처리한 제목이 단정한 느낌을 준다. 서체는 매우 가느다란 굵기여서 모던하면서도 위태로운 느낌을 주는데, 인물의 배치 또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불안한 정서가 더욱 강화된다. 쉽게 깨질 것 같은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이 포스터 전면을 흐른다.

한국판 포스터는 원본의 레이아웃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몇 가지 변화를 주었는데, 우선 글자를 갈색으로 바꾸어 따듯한 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수상내역을 강조하여 작품성 있는 영화라는 정보를 제공한다. 한국판 포스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두 개의 태그라인(카피)을 추가 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던 사랑일까?’와 ‘사랑과 현실 사이의 길’이라는 두 문장은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 정도의 변화는 일본판 포스터에 비하면 사실 양호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판 포스터는 비극적으로 끝난 ‘타이타닉’의 두 주인공이 다시 만났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주인공의 얼굴을 부각시킨 이 포스터는 타이타닉의 포스터와 레이아웃이 상당히 유사한데, 서로 엇갈리는 인물의 옆모습을 상단에 위치시킨 다음, 그 아래에 삼각형 구도의 다른 이미지를 겹쳐 놓았다. 물론 여기에도 빠지지 않는 상투적 카피가 있으니 바로 ‘운명적 사랑’ 되시겠다.

로맨틱 코미디의 경우 ‘한국판 포스터 제작 매뉴얼’이 있지는 않을까 의심스러울 만큼 불변의 법칙이 여럿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는 핑크색이 절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3월 12일 개봉예정인 [뉴욕은 언제나 사랑 중]이 대표적인 사례로, 원본 포스터와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온통 핑크색으로 뒤바뀐 뉴욕과 꽃다발을 보라. 화이트데이를 겨냥하여 개봉하기로 한 한국 배급사가 이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임을 강조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그 진심이 와 닿을 정도이다. 더불어 이 포스터에는 미묘한 차이가 숨겨져 있으니, 바로 ‘콜린 퍼스’의 한국 내 티켓파워이다. 또 한 명의 남자 주인공인 ’제프리 딘 모건’과 ’콜린 퍼스’는 ’우마 서먼’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서 있다.

그러나 미국판 포스터에는 제프리 딘 모건이 조금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두 남자의 귀가 잘린 지점을 비교해보시길) 한국판에서는 콜린 퍼스의 얼굴이 잘리지 않고 나옴으로써 우마 서먼이 왼쪽으로 이동하였고, 콜린 퍼스의 비중이 큰 것으로 표현되었다. 비록 미묘한 차이지만 이러한 변화에 의해 영화의 삼각관계는 다르게 인식된다. 원본 포스터는 여주인공이 콜린 퍼스의 손을 뿌리치고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돌아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데 반해, 한국 판 포스터는 우마 서먼과 콜린 퍼스의 사랑을 뒤에 서 있는 남자가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 다른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이다. 원제목에 ‘로맨틱’이라는 단어를 추가한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하여 개봉하였고, 전형적인 연말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였다. 미국판 포스터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또한 글자는 모두 검은색을 사용하고 있어 크리스마스의 이미지가 약한 편이다. 그러나 한국판 포스터는 눈이 내리는 배경을 추가하였고, 글자는 빨간색으로 변경되었다. 크리스마스의 설레는 느낌과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연인의 이미지가 부각되었으니, 이 정도면 수준급의 변형이라 할 만 하다.

2월 12일에 개봉한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역시 로맨스물의 규칙을 충실히 따른다. 검은색을 배경으로 사용한 원본 포스터와 달리, 한국판 포스터는 흰색을 배경으로 사용하여 밝고 경쾌한 느낌을 강조하였고, 제목에 핑크색을 삽입하여 달콤한 사랑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밝은 배경색에 핑크와 하트를 추가하며, 여성적인 서체를 활용할 것!" 이 모든 규칙을 따르고 있는 또 다른 영화로 [브레이크 업]이 있다. 제법 심각해 보이는 미국판과 달리 한국판 포스터는 ’이 두 남녀가 지금 이렇게 금을 그어놓고 있지만 절대 헤어지지 않습니다’를 강조하려는 양, ‘사랑’이라는 단어를 무한 반복한다. ‘사랑할 땐 몰랐던 사랑’이라는 카피로도 모자라 ‘이별후애(愛)’라는 조어까지 삽입하였으니, 이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물로 홍보하느라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을지 짐작이 된다.

물론 모든 영화의 포스터가 원작이 가장 뛰어난 것은 아니다.

[체인질링]의 포스터는 미국에서도 좋은 평가를 듣지 못하였는데, 안젤리나 졸리와 아들의 이미지 대비가 지나치게 큰데다가, 인물의 표정과 조명이 적절치 않아 아동학대를 주제로 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얻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체인질링]은 독일이나 스페인 등 해외개봉에서 다른 버전의 포스터를 채택하게 되었다. 어두운 갈색톤을 전면에 사용한 이 포스터는(우측 독일판 참조)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시대적 특성과 영화적 분위기와도 잘 어울린다. 특히 유리창에 비친 안젤리나 졸리의 정면 얼굴을 볼 수 있어, 유명한 배우가 출연하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에도 큰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마저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동일한 버전의 포스터에 다시 눈물을 추가한다.(독일판 포스터에서 안젤리나 졸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슬픈 영화’라는 상투적 홍보방식은 이런 형태로 강화되고, 관객은 영화를 특정 장르로 한정시켜 소비하는 습관을 반복한다.





by 칼럼니스트 3M흥업

PD 김경찬, 팝칼럼니스트 김태훈, 영화저널리스트 최광희, 대한민국을 사는 삼십대 후반 세 남자의 흥겨운 작업 이야기. 영화, 음악, 방송 등 대중문화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고, 무해한 편견과 유익한 욕망의 해방구를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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