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1.20 조회수 | 1,920

21세기스러운 귀기가 흐르는 최신식 스마트 저택


보자마자 책을 사게 만드는 종류의 제목이 있는데 ‘… 저택의 유령’이 여기에 해당된다. ‘… 저택의 살인’도 마찬가지로 좋지만 아무래도 너무 많으니까. 그러니 루스 웨어의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을 발견하자마자 사들인 건 나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웨어의 전작인 <인 어 다크, 다크 우드>, <우먼 인 캐빈 10>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거나 들었어도 잊었다. 아무래도 요새는 비슷해 보이는 여성 주인공 스릴러들이 많아서 구별이 쉽지 않다.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의 원제는 ‘The Turn of the Key’다. 번역제와는 조금 다른 기대감을 주는 제목이다. 얼마 전에 나온 넷플릭스 드라마 <블라이 저택의 유령>의 기반이 된 헨리 제임스의 소설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에서 단어 하나만 바꾼 것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은 <나사의 회전>의 재료들이 잔뜩 들어있다. 귀신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시골의 대저택, 저택에 사는 아이들, 아이들을 돌보러 온 젊은 여자, (아직까지는 살아있는) 남자 운전사, 나이 지긋한 여자 가정부 기타 등등.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에 있는 빅토리아 조 대저택이 배경이지만 그림은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일단 배경이 2017년의 현대다. 건축업체를 운영하는 부부가 얼마 전에 사들인 저택을 수리해서, 내부는 완전히 초현대적이 됐다. 집에 있는 모든 것에 인공지능이 달리고 음성인식 기능이 붙은 최신식 스마트 하우스다. 제임스 소설로 익숙한 고풍스러운 멋은 없다. 하지만 모든 게 앱으로 통제되는 이런 집에는 21세기스러운 귀기가 흐른다. 특히 집의 기능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풋내기에겐 더욱 그렇다.


소설 대부분은 스코틀랜드의 여자교도소인 HMP 찬워스에 갇혀 있는 화자가 렉스햄이라는 변호사에게 쓰는 편지의 형식을 취한다. 화자는 제목에 나오는 헤더브레 저택에서 입주 아이 돌보미로 일하던 스물일곱 살의 젊은 여자인데 집에서 돌보던 네 명의 여자아이 중 한 명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지금은 자기를 도와줄 사무변호사를 구하는 중이다.


이런 종류의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 원고의 성격은 중요하다.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고는 소설 안에서 구체적인 물건으로 존재한다. 그건 독자가 <나사의 회전>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원고의 내용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단지 웨어의 소설은 제임스의 소설보다는 단순하다. <나사의 회전>의 독자는 화자를 백 퍼센트 믿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이 독자를 기만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자가 읽는 건 정신 상태를 신용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정직한 여자의 글이다. 하지만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의 화자는 보다 정통적인 일인칭 장르 소설 화자처럼 글을 쓴다.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대놓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후반의 반전을 위해 사실을 은폐하고 그 사실을 또 은폐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보이지는 않는데, 생각해 보면 원래 소설의 일인칭 화자는 조금씩 이상한 사람들이다. 소설 형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냥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여기서 중요한 건 트릭이 아니라, 그 트릭과 반전으로 구성된 이 책이 <나사의 회전>보다 훨씬 단순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도 하나 이상의 해석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제임스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굳이 그래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만큼 기본 설명이 자기충족적이다.


제임스의 소설에서는 없는, 적어도 현대 독자들이 느낄 수 없는 현실 세계의 생생함이 있는 책이다. 특히 이 소설이 묘사하는 아이들은 <나사의 회전>의 플로라와 마일즈와는 달리 진짜 아이들의 불편함과 거친 느낌이 그대로 갖고 있고, 이는 이 소설이 가진 호러의 등뼈를 이룬다. 주인공의 직장 환경과 관련된 몇몇 인물들의 묘사 역시 현실적인 이슈를 반영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유령 이야기보다 더 무섭다. 유령은 대부분 상상 속 허구의 존재지만 이 환경은 달아나기 힘든 현실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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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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