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1.13 조회수 | 2,129

SF의 가장 진부한 클리셰? 모든 것이 그 정반대인 소설

1년 전 힘바 부족 출신인 수학천재 여자아이 빈티가 주인공인 은네디 오코라포르의 스페이스 오페라 <빈티 : 오치제를 바른 소녀>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사실 3부작의 1편이다.(관련 기사 :  백인 남성 디폴트 거부! 진흙을 몸에 바르는 아프리카 소녀가 주인공인 SF. 2019. 11. 20) 다들 예상했겠지만. 요샌 인상적인 캐릭터가 소설 한 편에만 등장하는 일은 드무니까.

얼마 전에 이 작품의 속편인 <빈티: 지구로 돌아온 소녀>가 나왔다. 전편 '오치제를 바른 소녀'가 '스타 워즈'의 '새로운 희망'이라면, '지구로 돌아온 소녀'는 '제국의 역습'이다. 동화처럼 명쾌하고 단순했던 전편과는 달리 조금 어둡고 진지하다. 주인공은 진정한 자신을 찾는 통과제의를 거친다. 결말은 클리프행어다.

1편에서 풀네임이 '나미브의 빈티 에케오파라 주주 담부 카입카'인 주인공은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나갔고 메두스족과 지구인 쿠시족 사이에서 벌어질뻔한 우주전쟁을 가까스로 막았다. 이 정도면 죽음의 별 폭파처럼 대단한 해피엔딩인데, 그래도 우주선 안에서 승객들이 외계인에게 학살당하는 걸 본 경험의 상흔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움자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에도 빈티는 계속 그 후유증에 시달린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물이 오르면 빈티는 친구가 된 메두스 족 오크우와 함께 지구로 돌아간다. 오크우는 평화 사절이지만 지구인들의 눈으로 보면 인간들을 학살하는 괴물일뿐이다. 메두스의 DNA에 감염된 채 우주에서 돌아온 빈티 역시 부정한 존재다. 다시 우주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불편한 긴장감이 돈다. 그리고 그 긴장감 상당부분은 원래부터 인종차별과 문화적 대립으로 바짝 날이 서 있던 지구의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는 힘바족도 결백하지는 않다. 이 와중에 빈티는 계시를 받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여정을 떠난다. 빈티가 자신에 대해 알아갈수록 소설 속 세계는 조금씩 넓어져 간다.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결국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전편과 마찬가지로 <빈티: 지구로 돌아온 소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환상적인 세계 묘사다. 전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몸에 착 달라붙는 반짝반짝 옷을 입은 백인 남자가 광선총을 들고 끝없이 이어지는 장식없는 금속 터널 안을 걷는 모습’을 SF의 가장 진부한 클리셰'라고 말한 적 있는데 이 소설은 모든 게 정반대다. 이 소설 어디를 봐도 ‘장식 없는 금속 터널’을 닮은 건 없다. 우주선도 거대한 생명체를 닮았거나 실제로 생명체이고 주인공 빈티 역시 오치제와 전통 의상을 고집한다. 심지어 다들 건조하게 상상하는 수학도 이 소설에서는 환상적인 비주얼의 환각체험으로 묘사된다. 우주선, 우주여행, 우주전쟁, 외계인과 같은 SF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정작 우리가 책을 읽으며 그릴 수 있는 심상은 아프리카 문화를 바탕으로 한 판타지에 가깝다. 심지어 우주 묘사도 그렇다.

갑갑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외계 종족과 교류하는 미래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조금 재미없다고 하더라고 더 발전했길 바라게 되니까. 이 시대가 되면 인종차별, 종족차별, 성차별은 어느 정도 넘어서야 정상이 아닐까. 우주로 나가 우주전쟁을 막고 돌아온 영웅인 주인공이 “너 같은 것과 약혼할 남자가 있을까” 같은 말을 들어야 한다면 이게 뭔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은하제국이 나오는 '스타 워즈'의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쓴다고 해도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향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재료를 끌어다 쓰는 건 결국 과거와, 곧 과거로 바뀌어가는 현재이고, 우린 미래의 배경으로 현재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빈티의 이야기는 다음 편인 < Binti: The Night Masquerade >에서 마무리지어진다. 빈티를 주인공으로 한 'Binti: Sacred Fire'라는 단편도 있는데, 이 작품도 국내에 번역될 지는 모르겠다. '빈티 삼부작'을 모두 수록한 옴니버스 책에는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훌루에서는 이 삼부작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시리즈가 계획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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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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