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1.06 조회수 | 1,164

‘우연’ 때문에 (불)가능한 완전 범죄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사진 : Elke Wetzig)

1월 5일은 스위스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뒤렌마트는 ‘노부인의 방문’, ‘로물로스 대제’, ‘물리학자들’ 같은 희곡으로 유명한 극작가이고 우리나라에서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감상 되는 작품들 역시 이 희곡들이다. 법과 정의, 과학의 윤리와 같은 진지한 주제들을 극장주의적인 테크닉 안에서 독특한 블랙 유머를 통해 그려낸 작품들로, 희곡이나 독일어 유머가 취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한 번 시도해보시기 바란다. 주제나 예술적 성취를 떠나 일단 재미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또다른 경력이 있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독일어권 추리소설 역사를 언급할 때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추리작가이다. 경력초기에 계속 흥행실패를 거듭하다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어떤 비평가들은 진지한 극작가의 외도라고 보는데, 그건 좀 아닌 거 같다. 일단 뒤렌마트는 극작가로 성공한 뒤에도 추리소설을 버리지 않고 몇십 년 동안 꾸준히 신작을 냈다. 그리고 법과 정의에 대해 평생 동안 관심을 보여온 작가가 추리소설을 쓰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가? 뒤렌마트는 장르를 기계적으로 빌린 것도 아니었다. 추리소설의 형식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보이며 이 의미를 탐구하고 변형을 시도했다. 대표작 ‘약속’에 ‘추리소설에 부치는 진혼곡’이라는 거창한 부제를 붙인 건 좀 심했다고 생각하지만. 뒤렌마트의 형식 파괴 실험 상당수는 황금시대 때부터 수많은 작가들이 해온 것이니까. 물론 작품 자체는 휼륭하다.

우리나라에는 뒤렌마트의 추리소설이 다섯 편 번역되어 있다. ‘판사와 형리’, ‘혐의’, ‘약속’, ‘사고’, ‘법’. 앞의 네 작품은 둘로 묶여서 <판사와 형리>, <약속>이라는 책으로 묶였으니 책은 세 권이다. ‘사고’는 원작이 (결말이 다른) 라디오 드라마인데, 이 버전도 한 번 번역된 적 있다. 지금 서점에서 찾을 수는 없겠지만. 이들 번역은 모두 1980~1990년대 것으로, 작가의 유족에게 저작권료가 돌아가는 책은 없는 것 같다.

오늘은 <판사와 형리>에 수록된 두 중편소설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이 작품은 주인공이 같다. 콘스탄티노플과 프랑크푸르트에서 활약하다 1933년 베른으로 돌아온 베를라흐(Bärlach) 경감이다.(책에는 베르라하라는 표기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뒤렌마트는 ‘The Inspector Bärlach Mysteries’로 묶이는 자기만의 명탐정도 갖고 있는 셈이다. 두 작품에서 베를라흐의 역할은 전통적인 명탐정의 역할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판사와 형리’는 슈미트라는 형사가 살해당하면서 시작된다. 슈미트의 상사였던 베를라흐는 슈미트의 동료 형사 찬츠와 함께 이 사건을 맡는다. 그들의 수사 과정 중 독자는 슈미트가 가스트만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을 수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가스트만이 범인일까? 일단 이 남자는 알리바이가 있다.

전통 추리소설이라면 베를라흐가 가스트만의 알리바이를 깨는 길로 가겠지만, 여기서부터 ‘판사와 형리’는 범인 찾기 이야기의 구조에서 벗어난다. 베를라흐와 가스트만은 콘스탄티노플 시절 알던 사이였다. 40년 전 이들은 당시 뒤렌마트가 평생 동안 매혹되었던 우연이라는 주제를 두고 토론을 벌인다. 베를라흐는 만사에 개입하는 우연이라는 변수 때문에 완전범죄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가스트만은 바로 그 혼란스러움 때문에 완전범죄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가스트만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를 입증하고, 베를라흐는 40년 동안 가스트만을 추적한다. 그리고 소설 후반엔 이 혼란을 마무리 짓고 최선의 정의를 가져다 주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혐의’는 전편의 사건이 끝나고 수술 때문에 입원한 베를라흐가 ‘라이프’ 잡지에서 잔인무도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수용소 의사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시작된다. 베를라흐의 친구인 의사 훙커토벨은 그 의사가 지금 취리히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와 동일인물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공식적으로 의사는 전쟁이 끝나고 자살했다. 베를라흐는 병실에서 안락의자 탐정이 되어 수용소 의사가 어떻게 신분을 위장해 탈출할 수 있었는지를 추리한다.

소설은 이를 입증하려는 베를라흐가 그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가명으로 입원하면서 방향이 전환된다. 여기서부터 베를라흐의 목숨을 건 생존기가 스릴러의 기반을 이루지만, 이 재료들은 독일 메르헨처럼 고풍스럽게 환상적이다. 그리고 수용소 의사 엠멘베르거는 가스트만 뺨치는 실존주의적인 악당이다.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베를라흐는 사건을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의의 의미를 입증하고 실현해야 한다.

<판사와 형리>는 ‘End of the Game’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적이 있다. 배우이기도 한 막시밀리안의 셸의 1975년 감독작이었는데, 독일 영화지만 영어권 배우들이 출연했다. 베를라흐를 연기한 배우는 감독이기도 한 마틴 리트, 가스트만 역 배우는 로버트 쇼, 찬스 역 배우는 존 보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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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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