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12.23 조회수 | 2,720

폭력적 이야기엔 여성 캐릭터가 안 어울린다? 핑계일 뿐!

크리스틴 맹건의 2018년 데뷔작 <탄제린>의 배경은 막 독립을 앞둔 정치적 격동기였던 1956년의 모로코, 그중에서도 당시 국제관리지대였던 도시 탕헤르다. 이 도시의 정교한 묘사는 소설의 큰 매력 중 하나지만, 당시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던 모로코인들은 이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한 명만 제외하면 모두 미국인으로, 당시의 정치 상황은 이들을 불안하게 하는 분위기로만 묘사될 뿐이다. 소설의 제목 ‘탄제린’은 ‘탕헤르 사람’이라는 뜻으로, 현지인들이 탕헤르에 사는 외국인들을 부르는 호칭이라고 한다.(귤이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앨리스와 루시라는 두 여자다. 두 사람은 당시에 여대였던 베닝턴 대학 시절에 룸메이트였다. 학교를 떠난 뒤 앨리스는 존이라는 남자와 결혼해서 탕헤르에 왔다. 소설이 시작되면 루시가 앨리스를 만나려 탕헤르에 온다. 둘 사이엔 이상한 긴장감이 돈다. 이들에겐 아직 작가가 언급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두 사람의 과거가 조금씩 벗겨지면서 현재형의 드라마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두 시간선 양쪽에 시체가 생긴다.

조이스 캐럴 오츠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추천사를 써주었다. “도나 타트와 길리언 플린과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히치콕이 연출한 작품 같다.” 거의 스포일러에 가깝다. 베닝턴 대학 시절의 회상은 도나 타트를 연상하게 한다. 위험한 여성 캐릭터와 두 화자를 오가는 진행방식은 <나를 찾아줘>와 닮았다. 그리고 1950년대에 머나먼 이국에 사는 친구를 찾아 여행선을 타고 온 위험한 주인공 하면 떠오르는 게 뭐가 있는가? 맞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다.

곧장 말하자면 히치콕은 이런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히치콕의 전성기엔 할리우드에선 만들 수 없었던 내용이다. 도나 타트 파트는 잘 활용되었지만 다른 두 파트 속에 휩쓸린다. <나를 찾아줘> 파트는 공을 들였지만 아주 성공적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내레이터로 쓰면서 두 사람에게 구별되지 않는 비슷한 어투를 준 건 위험했다. 믿을 수 없는 화자가 주는 장점이 분명 있지만, 같은 어투의 외부 화자가 이 두 사람을 보다 선명하게 묘사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는 처음부터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그려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도 더 잘 어울렸을 것이다.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건 역시 하이스미스 파트이다. <탄제린>이라는 소설 자체가 하이스미스 소설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장르화된 것이다. 하이스미스의 초기 전성기가 시대 배경이고 매우 하이스미스스러운 인물이 두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인터뷰를 읽어보니, 맹건은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고 한다. 단지 ‘리플리’와 ‘1월의 두 얼굴’ 영화만 본 모양인데, 하긴 한 작가의 영향이 직접 독서로 이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지금도 수많은 작가가 읽은 적 없는 옛 소설의 영향 아래 새 책을 쓰고 있을 테니까.

하이스미스 스릴러와 가장 큰 차이점은 두 주인공이 모두 여자라는 것이다. 하이스미스는 자기가 쓰는 폭력적인 이야기에서 여성 캐릭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집요하게 남자 주인공들만 고집했는데, 하이스미스의 영향을 받은 지금 시대의 후배들은 이게 그냥 핑계였다는 걸 입증하고 있는 중이다. 여성 캐릭터라고 해서 하이스미스 소설 스타일의 오싹한 범죄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이스미스가 거의 씨를 말려버린 이 영토에서 신선한 맛을 더해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앨리스와 루시의 관계는 하이스미스 남자들의 관계를 그냥 거울상으로 뒤집은 게 아니다. 비슷한 길을 가더라도 여성 캐릭터만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따로 있다.

출판되기도 전에 조지 클루니가 판권을 샀다. 역시 출판되기 전인 2016년에 스칼렛 조핸슨이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그건 영화 소식에 밝은 독자들은 모두 조핸슨의 얼굴을 머리에 담고 책을 읽었다는 말인데, 이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 인터파크도서 북DB www.book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돌아온 ‘원더우먼’...영화와 함께 즐기면 좋은 책 2020.12.30
89세로 타계...'존 르 카레'를 읽는 어떤 순서 2020.12.16
댓글 주제와 무관한 댓글은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