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12.16 조회수 | 3,432

89세로 타계...'존 르 카레'를 읽는 어떤 순서

존 르 카레가 세상을 떴다. 89살까지 맑은 정신으로 현재진행형의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면서 살아왔으니 부러운 삶이다.

마지막 소설은 2019년에 나온 <에이전트 러닝 인 더 필드(Agent Running in the Field)>인데,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대신 사놓고 몇 달 동안 방치해두고 있었던 2017년작 <스파이의 유산>을 꺼내들어 읽었다.

<스파이의 유산>은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스마일리는 르 카레가 1961년에 쓴 데뷔작인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때부터 주인공으로 삼은 인물로, 제임스 본드와 함께 냉전시대 영국 스파이 소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폭력적인 쾌락주의자인 본드가 과장된 남성판타지라면, 비폭력적이고 사색적인 스마일리는 현실적인 스파이를 대표한다. 본드가 전세계를 누비며 미녀들과 섹스를 하고 지구를 정복하려는 과대망상증 악당들과 싸운다면, 스마일리는 런던을 쉽게 떠나지 않으며, 자유분방한 삶을 즐기는 건 바람둥이인 아내 앤이다. 본드와는 달리 스마일리는 종종 조연이다. 존 르 카레의 가장 유명한 소설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서도 스마일리는 주인공인 앨릭 리머스 뒤에 그림자처럼 머문다.

스마일리는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이자 내레이터는 시리즈 내내 스마일리의 오른팔로 일했던 피터 길럼이다. 은퇴해서 브르타뉴의 농장에 살고 있는 길럼은 런던 정보부의 호출을 받는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비극적인 주인공인 앨릭 리머스와 엘리자베스 골드의 유족이 정보부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길럼은 과거로 돌아가는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고, 그 회고의 과정은 르 카레 특유의 긴 서류 작업과 취조로 이어진다.

독립된 소설로는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사전정보 없이 읽는다고 내용 이해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읽는다면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의 스포일러에 가차 없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적어도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만큼은 먼저 읽는 게 좋겠다.

그렇다고 자기 이야기가 없는 책이라는 건 아니다. 주인공이 스마일리에서 길럼으로 바뀌면서 르 카레는 새로운 이야기의 길을 찾는다. 스마일리와는 달리 길럼은 천재 스파이도 아니고 작전의 책임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앨릭 리머스처럼 비장한 드라마를 품을만한 무게도 없다. 기껏해야 장기판의 졸이고, 심지어 냉전도 오래 전에 끝나서 그 쓰임도 사라졌다. 길럼의 애잔함은 조지 스마일리의 익숙한 애잔함과는 다른 성격이고 오히려 더 공감할만한 부분도 있다.

대부분 르 카레의 독자들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뒷이야기가 더 궁금할 것이다. 그 특정인물이 어떻게 스마일리와 얽히고 큰 드라마에 연결되었는가. 스마일리는 소설 후반의 그 비극에 책임이 있는가. 이 사건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스파이의 유산>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사건들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단지, 이 작업이 꼭 필요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나이 든 작가가, 자기가 만든 허구의 유니버스를 정리하는 건 흔한 일인데,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서도 그 작업이 필요했는지? 스마일리의 등장여부와 상관없이 그 소설은 '스탠드 얼론'으로 읽는 게 가장 여운이 큰데 말이다.

헛갈리는 부분이 있다. 소설의 시대 배경은 아무리 일러도 2010년 이후이다.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있는 시대이다. 그러니까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사건 50년 이후의 이야기란 말인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때 수정된 스마일리의 나이로 계산해도 나이가 잘 맞지 않는다. 주인공이 느리게 나이를 먹는 플로팅 타임라인 때문인데, 냉전시대 스파이처럼 시대에 결박되어 있는 인물을 다루면서 이렇게 나이를 융통성있게 그리는 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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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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